즐거움 찾기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며 익숙하지 않은 문화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택했었다. 밝고 외향적인 에너지를 가진 나였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감지하고는 주로 튀지 않고 묻혀 지나가고자 했다. 물론 내가 나서서 같은 교회에 속한 친구의 베이비 샤워나 다른 주로 이사를 계획하는 친구를 위한 파티를 호스트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느끼는 마음처럼 가깝게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Northern Virginia 지역에는 나와 같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기에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친분을 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전혀 없는 내가 다니던 교회 안에서 주로 인간관계를 맺었던 터라 내가 더욱 위축이 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어차피 미국 사회에서 적응해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또한 그 교회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믿었기에 다른 한인 교회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두 살이 채 되지 않은 첫아이와 뱃속에 둘째를 품고 시작한 세 식구는 삼 년 후 남편의 로스쿨 공부가 끝날 무렵 다섯 식구가 되었다. 또 이년 후 넷째가 태어나면서 네 아이들을 양육하며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 나의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외로움이 있었고 나는 아이들 혹은 음식 사진을 찍는 것, 제과제빵 또는 다양한 요릴 하는 것을 나의 창의적인 분출구로 삼으며 그 외로움을 이겨내려 했던 것 같다.
막내아이가 만 세돌이 되고 위에 세 아이들이 모두 오후 4:30까지 학교에 등교하게 된 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여전히 준비한다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영주권을 획득하며 나도 일을 할 수 있는 work permit이 생겼으니,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찾던 중 교사가 늘 부족한 미국에서 내가 살던 지역에서 단기간으로 중등교사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내가 늘 수학이 자신 있는 과목이었던 터라 수학선생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교사 자격증 코스를 시작하기에 앞서 나의
수학 지식을 견고히 하고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나의 수준에 맞는 수학수업 듣기를 시작하였다. 수학을 공부하며 좋은 성적을 받으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겼고, 수업 중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하며 조금씩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고 때마침 외국어-영어 통역서비스를 전화나 혹은 비디오를 통해 제공하는 기업에서 한국어 통역사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사 과정을 준비하며 낮에 네 시간 동안은 통역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유틸리티 회사, 소셜 워커, 통신사, 병원 등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갖는 한국사람들과 기관 측을 대변하여 통역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재빠르게 양자가 소통할 수 있는 다리가 되었고 그러면서 영어로 말하는데 많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 중간에 코로나바이러스 발병으로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았고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면서 네 시간 통역과 교사자격증 획득 준비를 병행해 나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학교들의 락다운이 끝이 나며 다시 학교들이 문을 열었고 무사히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후 나는 2020-2021 school year부터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교사로서 일을 하며 나의 E성향을 더 잘 분출할 수 있었고, 그 때문인지 미국생활이 전보다 더 많이 즐거워졌다. 지난 15년간의 미국 생활은 내게 마음고생도 안겨주었지만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예쁜 네 아이를 주었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는 나의 E성향을 다시금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