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2학년, 한국으로 말하면 고 3이 되는 아들은 중, 고등학생이 되며 심한 성장통을 느꼈다. 아들이 7학년, 중학교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메릴랜드주에서 버지니아 주로 이사를 했는데, 나는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될 때라 모든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로 섞일 때라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비교적 쉽지 않을까라고 판단했었는데 실제로 그에게는 쉽지 않았다. 킨더(유치원) 때부터 6학년까지 한 곳에 자랐기 때문에 어딜가나 익숙했던 환경, 사람들 안에 있었는데, 버지니아로 이사오니 자신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려서부터 연극/뮤지컬을 즐겼던 아들은 메릴랜드에서 슈렉에서 당나귀를 맡아 청중들을 웃음 바다에 빠뜨렸었는데, 버지니아로 이사와서는 작은 역 하나를 따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연극반 선생님이 자신의 유머코드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그 좋아하던 연극반에서도 흥미를 잃었다.
아들이 8학년이 되었을 때 코비드가 발생했고, 8학년 중간에 학교 문을 닫았다. 미국학교는 4 분기로 나뉘어지는데 2분기에 닫았던 학교가 3,4분기에는 온라인으로 운영이 되어서 결국 8학년 절반은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7학년에 사귄 가장 친한 친구는 이 지역에 있는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아들이 9학년이 되었을 때는 코비드 때문에 학교가 모두 온라인으로 운영되어, 물론 이 시기의 아이들이 다들 비슷한 처지였지만, 당시 친구를 사귀고 싶은 욕구가 폭발했던 아들에게 참 어려웠던 시기였다. 코비드동안 이미 친한 아이들은 오히려 자주 모였던 것같은데 이 시기 동안 아들은 친구를 사귈 수있는 기회가 더욱 없어졌다. 10학년 때 비로소 코비드 이후 정상화가 된 학교를 다니며 학교가기 싫어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고, 교실에서 팔다리가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선생님께 호소하여 남편과 나는 전화를 받고 아들을 학교에서 픽업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 어느날은 학교 상담사의 "Are you currently thinking about or have you recently thought about death or harming yourself?" 라는 질문에 아들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남편과 나는 다시금 학교에서 전화를 받고 아들을 데리러 가야했고, 아들이 상담사의 이와같은 질문에 머뭇거렸기 때문에 우리는 아들을 정신과 병원에 데려가야만 한다는 지시를 학교로 부터 받았다. 아들이 이 무렵 학교에서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아 제대로 수업에 임할 수 없다고 했듯이 아침에 일어나서도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아들은 자살 충동을 느낄정도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같다.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아들과 싸움하는데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을 하는 게 좋겠다는 정신과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들이 병원에서 일주일간 생활하게 되었다.
일주일간 규칙적인 시간에 취침, 기상하는 습관도 잘 들였고, 또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친구들과 일주일을 함께 지내면서 많이 밝아지고, 또 좋은 습관을 들여와서 그 기간에 너무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로 복귀하고 나서는 같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변화가 없는 학교 환경은 아이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고 여전히 학교 가는 것을 즐겨하지 못했다. 아들이 다녔던 학교는 공립학교로 7학년부터 12학년이 모두 속해있는 전교생이 4000명이 넘는 아주 큰 규모의 학교인데 규모가 너무 크다보니 그 안에서 더욱 외로움을 느꼈던 것같다. 또 한 교실이 30명인데 구체적이지 않은 지시사항에 맞춰 과제를 할 때 어려움을 겪는 아들이 개인적인 피드백을 받기에는 어려운 교실 환경이었다. 여름 방학 동안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또 마음껏 늦잠을 자다가 개학을 맞으면서 더더욱 일찍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하겠다고 걱정은 하면서도 공립학교 외에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고 2023년 9월학기가 시작하면서 아들의 등교거부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주변의 사립학교였다.
페어펙스 카운티 안에 32개의 사립 고등학교가 있고, 고등학교 연간 등록금은 만불에서 육만불이상까지 다양하다. 주로 종교(기독교, 카톨릭, 이슬람 등)적인 성향을 띈 학교들이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낮은편이라면 아이비리그와 같은 경쟁력있는 대학 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고등학교는 등록금이 높은 학교에 속한다. 중학교 정도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아들은 가족과 함께 참석하던 교회도 그만 다니기 시작한 터라 교회이름을 건 학교들에는 거부 반응을 보였다. 또한 입시 위주의 학교는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더 가중시킬 것이라고 판단했고, 내가 찾고자 하는 사립학교는 교실 규모가 작아서 아이가 질문이 있을 때 쉽게 물어볼 수 있고, 아이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오픈 마인드로 다양한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찾은 학교가 New School of Northern Virginia였다. 한 클래스 사이즈가 최대 11명이란 것이 마음에 들었고, 기존 학교에서 들었던 학년마다 들어야하는 English class 혹은 world history/American history 대신 다양한 과목들(magical realism, sociology and science fiction, language & identiry, 그리고 the road to unfreedom)이 아이의 관심을 끌었다.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서 나오는 것조차 힘들게 느꼈을 때 정신과 상담도 받아보고, 우울증 약도 작은 양 복용해 보았지만 결국 상담 후에 돌아가야 할 학교가 아이가 가고 싶은 환경이 아닐 때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학교를 바꾸고, 아이가 수업에서 재미를 느끼고, 친구들을 차차 사귀어 가면서 아침에 등교길에 나에게 학교를 바꾸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할 때 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학교에서 11학년을 마치고 이제 마지막 12학년을 앞두고 있는 아들, 이렇게 일년은 보냈지만 여전히 대학진학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학교에서 방학동안 어떤 종류에 대학이 있는지 알아보고 대학입시에 필요한 에세이를 쓰는 과정이 있어 등록하였다. 하지만 대학에 가는 것 자체가 아직 두려운 아들은 첫째날 등교부터 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너무나 고맙게도 수면의사인 지인이 아들과 전화 통화를 통해 용기를 붙돋아 주었고, 둘째날 학교를 가고부터는 아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현재 작은 규모인 사립학교에서 깊이있게 학습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 아들은 Liberal Arts College에 진학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삼주간 열심히 대학 리서치를 한 아들의 결론이다. 처음에는 부모의 욕심으로 좀 더 이름있는 아이비리그 대학과 같은 유명대학이나 아니면 UVA (University of Virginia)와 같은 주립대학을 목표를 해주기를 바랬었다. UVA는 주립대학이면서도 아주 좋은 학교라고 들었기 때문에 권했지만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또한 우리의 재정상태를 넣었을 때 등록금을 산정해보면 아이비리그 학교들은 연간 부담액이 거의 10만불이어서 자녀가 넷인 우리 부부는 주립학교 비용(3만7천불 가량)만 지원해줄 수 있지 나머지는 론을 받거나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내야한다고 우리 부부의 의사를 전달하니 본인은 론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의 학점, SAT 점수, 그 외에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학업 외 활동들을 기반으로 merit scholarship을 받을 수 있는 liberal arts college를 찾을거라면서 나에게 다음 주에 college tour를 갈 것을 제안했다. 총 8개 학교 방문 계획을 세우고, 두 학교에서는 인터뷰도 잡고, 또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교수가 있는 학교에 방문하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라고 했다. 이년 전 우울증으로 침대에서 나오지도 못하던 아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학교들을 리서치하고 대학투어 계획을 스스로 모두 짰다는 사실이 너무나 대견하다. 또 지난 주에는 동네에서 하는 Willy Wonka Musical에 참여하여 너무 멋진 Willy Wonka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때로 미래에 무언가가 되기위해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삶을 희생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아들이 이름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 왠지 나의 자존심이 올라가는 걸로 생각하고 자꾸 아들에게 AP class 혹은 좋은 학교를 가는 것을 그간 권했던 건 아닌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롯이 아들의 몫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순간 순간을 즐기면서 할 수있도록 최대한 도와주는 게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