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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명의 관객 Jun 27. 2024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Monster) 2023.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아직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모든 작품을 보지 못했다는 핑계로 그의 저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읽기를 미루어 오다가 괴물을 보고 이제는 그런 잡설을 넣어두고 당장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책을 읽던 중 한 문장이 마음 깊이 박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하나]의 각본 초고에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단 살아라는 고레에다의 메시지는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나의 생각이 의미에 도달하기 이전에 이미 풍성한 삶에 이르게 한다. 마지막에 두 소년이 활짝 웃으며 달려가는 모습은 말 그대로 ‘풍성한 삶’이었다. 소년들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 빛을 받는 순간이 찾아온다.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데뷔작 <환상의 빛> 이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각본을 연출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로 연출을 시작했던 그는 <원더풀 라이프>나 <아무도 모른다>같은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 기록적 화법을 극영화에 줄곧 적절하게 끌어들여왔다. 그러나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과 함께한 <괴물>은 그런 족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휴먼’을 보여준다. 영화가 이런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면 논증이 가능한 비평에서 벗어난다. 숏 바이 숏으로 장면을 하나씩 해체하면서 보기 보다 그 자체로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괴물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동일한 사건을 사오리와 호리 선생님의 시선을 경유하여 끝내 미나토에 다다른다. 피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는 변곡점, 이 변곡점이 굳이 같은 이야기를 3가지의 시선을 담아낸 이유이다. 이 영화가 3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1부와 2부를 굳이 경유해야만 하는 이야기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영화에서 괴물을 찾으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유발한 관객의 실수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영화의 시작, 화재 장면과 함께 ‘괴물’이라는 타이틀이 건물 위에 새겨진다. 여기서의 사이렌 소리는 동일한 사건이 각각의 인물의 시점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증표다. 각 인물의 시점은 화재라는 재난으로 시작하여 끝끝내 태풍이라는 재난으로 한곳에 모인다. [괴물]은 재난으로 문을 열고 재난으로 닫는 영화다. 불로 활활 태우며 시작하고 물로 그것을 끄는 영화다.


사오리는 미나토의 등굣길에 흰 선을 벗어나면 지옥이라고 장난스러운 투로 말한다. 사오리는 그런 사람이다. 주위가 조금 시끄러울지언정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키려는 사람. 아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가 끝내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 그녀의 불완전한 시선으로 시작된 정의는 피해자의 가해화를 진행시킨다. 요컨대 개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에 비해 시간의 흐름과 시선은 절대적이어서 개인은 질 수밖에 없다. <괴물>의 질문은 이즈음 선명해진다. 그 무력함 앞에서 인간은 오해를 경유하거나 그 자리에 멈춘다. 사오리가 이야기하는 흰 선이 그녀에게는 당연한 것이듯, 그녀가 미나토에게 바라는 평범한 가정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은 미나토에게 폭력적이다. 미나토의 자아 정체성을 공격한다. 차에 기대어 ‘나는 아빠처럼 될 수 없어’라 조용히 속삭이다가 갑작스럽게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장면은 이 모든 당연한 것에서의 탈출이다. 미나토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흰 선 안에 서있어야 하는 당연한 것도 할 수 없다. 흰 선은 간단한 조건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벗어났을 때의 상황은 그녀가 말했듯 ‘지옥’으로 묘사된다.



책 속의 오탈자를 교정하는 것이 취미인 ‘호리’는 취미처럼 반듯한 사람이다. 아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취미는 금붕어를 키우는 것인데, 금붕어 하나가 뒤집어져 있다. 뒤집어진 금붕어를 키우는 호리이기에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뒤집어서 쓰는 요리를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과자 도둑 이야기를 하는 교장 선생님은 아무래도 과거에 자신의 손자를 실수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처럼 보인다. 과자 도둑이 과자를 훔쳐 갈까 두려워 과자를 고르지도 않으려 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결국 잃을 것이 두려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기고백적 이야기다. 인간의 마음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다니는 교장 선생님이 자신을 발산하는 것은 오로지 호른을 불 때뿐이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책감을 꾹꾹 눌러 담는 그녀이기에 감정을 발산하기 위해 방화를 저지르고 나오는 요리를 발견하고 남들에게 얘기할 수 없어 죽을 것만 같던 미나토의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요리의 아빠는 요리가 ‘돼지의 뇌’를 가졌다고 말하면서 꽃에 물을 준다. 여기서의 물은 강제적인 세뇌로 작용하는 물이다. 방화를 저지르는 요리가 불의 이미지라면 요리 아버지의 물은 강제로 요리를 잠재우는 폭력이다. 반대로 미나토는 요리가 저지르는 불을 흙과 물로 꺼버리는 정화의 물이다. 불과 물이 만나 이루어지는 것은 두 소년이 가지고 있던 고민의 정화다. 영화의 마지막, 끝내 태풍이라는 재난이 당도한다. 이 재난은 두 소년들에게는 왜인지 재난이 아니라 정화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폭풍우를 맞으며 애타게 아이들을 찾는 사오리와 호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있는 교장 선생님과는 다르게 말이다. 아이들이 영화 내내 이야기하는 ‘빅크런치’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되감기 하듯 되돌아간다. 거센 비는 아이들의 고민을 씻어내린다. 그리고 아이들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달려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노래 제목의 제목은 <Aqua>다.


괴물은 누구게 게임에서 요리는 스스로를 괴물로 칭한다. 내 이마 위의 그림을 내가 아닌 타인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이 게임처럼 우리가 타인에 의해 규정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마지막에 “우리 다시 태어난 걸까?” “아닌 것 같아” “그래? 다행이다”라 말한다. 아이들은 그대로지만 영화는 미나토와 요리에게 따스한 햇살을 내린다. 폭풍우 속에 있는 어른들의 세상과 유리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 햇살은 너무 따스한 나머지 아이들의 죽음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태풍 속에 남겨진 인물들의 시선은 진실에 닿지도 않았다. 다시 여기서 맨 처음 이야기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저서 속 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하게 하겠다는 그의 말처럼,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고, 영화는 무언가의 시선을 통해 오해와 단절, 지속을 응시하며 작은 존재들이 얽히고설킨 관계망 안에서 역동하는 세계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세상을 이루는 이들이 상존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것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끝났음에도 이토록 엔딩이 우리에게 위로로 다가온 이유일 것이다. 시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그 의미에 도달하지 못함을 시인하면서도 풍성한 삶을 축복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기록이 위안되지 않을 수 없다.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인터뷰에서 “단 한 명의 외로운 사람을 위해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다. [괴물]은 영화 내내 ‘괴물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나는 당신을 축복하겠다”며 질문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며 끝난다. 이 대답과 생각들이, 영화의 엔딩 나들목에 걸터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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