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ktx를 타기 전 필수 코스 중 하나인 화장실. 1층엔 줄이 너무 길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1층 보다 줄이 적긴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인내심이 필요한 시간. 서울이라는 지역 안에 있으면 왠지 창의적인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텐션이 생기는데, 내가 사는 지역으로 가면 그게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 돌아가는 길이 아쉽기도 하지만, 피곤에 누적된 몸에게는 시원한 시간이다.
줄이 점점 줄어들어 사람들이 볼일을 끝내고 나오는 빈 곳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빈 곳을 확인하더니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빈 곳으로 가버렸다. 혼자서 이 상황을 지켜봤다면 ‘똥 싸고 물을 안 내렸거나, 막혔거나, 사용하지 못할 만큼 더럽거나 그중 하나구나. 나도 저기는 못 가겠지?‘라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쳤을 텐데, 동행인이 있었기에 달랐다. 동행인은 나보다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순간 뒤를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저기 뭔가가 있나?”하며 대수롭지 않게 동행인의 표정에 대꾸했는데, 동행인은 확실한 것 하나 없는 나의 문장을 이해하며 몸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러나 내 말을 다시 되새기며 큭큭하고 웃어대며 다시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뭔가가 있나?ㅋㅋ” 동행인이 되새긴 내 말을 듣고 나로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실 똥을 싸고 물은 안 내렸거나, 막혔거나, 사용하지 못할 만큼 더러운 것 중에 하나일 확률이 무지 높은, 그리 재미있는 추리가 되지 못할 심심하거나 어쩌면 유쾌하지 못한 상황을 궁금해하며 탐구하는 듯한 문장을 사용한 것이 어이없이 웃겼다. 내 차례가 다가와 빈 곳에 들어가 볼일을 보는 순간까지 어이없이 웃겨서 계속 속으로 피식거리며 그 문장을 돼 내었다. ‘저기 뭔가가 있나.‘ 그리고 볼일을 마치고 처리하려 휴지를 잡아 빼는데, 휴지의 끝을 보았다. 아직 밖에는 줄이 한창이고 사람들은 복제인간들처럼 계속해서 들어올 텐데, 다음에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뒤처리할 수 있는 휴지는 없었다.
‘어쩌지. 말을 해줘야겠지? 내가 당사자라면 정말 당황스러울 테니까.’ 마지막 휴지를 내가 완벽히 차지하여 물속으로 유유히 보내고 문을 열고 나온 뒤 내가 나온 빈 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여기 휴지 없어요.”라고 말했다. 내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린 건지, 외국인이라 한국어를 못 알아들은 건지, 휴지가 없는 게 상관없던 건지 그 사람은 딱히 대꾸를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똥이면 대환장파틴데.’
그렇게 나의 집이 있는 지역으로 돌아오고 다음날에 하루 일과를 끝내며 퇴근하는 길 너무 먹고 싶은 라면을 사러 동네마트로 반려인과 함께 향했다. 퇴근길에 집 근처 마트가 가끔 운영을 종료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어서, 편의점을 갈까, 마트를 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편의점은 대체로 가격이 비싸다는 인식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마트로 결정했다. 마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까지 편의점이냐 마트냐 하며 무논리와 뇌피셜로 범벅된 대화를 평소처럼 했다. 라면 코너로 진입. 내가 원하는 라면 묶음은 없었기에 반려인이 탄식을 내뱉으려는 찰나 내가 낱개를 발견했다.
“오예!” 그렇지만 단 2개. 허기짐에 타오르는 나를 위로하기엔 부족한 숫자라 느껴져서 아쉬워하니, 반려인은 두 개다 네가 먹으라며 나무랐다. ‘그렇지. 솔직히 1개만 먹어도 충분히 배고픔은 가시겠지. 더구나 밥 먹고 후식도 먹으려면 일부러 적게 먹어야 돼.’라고 허기짐을 달래며 라면을 집었다. 계산하고 마트에서 나오며, 마지막 남은 라면 2개를 내가 차지했다. 반려인에게 서울역 화장실 마지막 휴지 사건을 이야기하며, “마지막 휴지도 내가 차지하고, 마지막 라면 2개도 내가 차지했네. 이건 뭔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라며 럭키스러운 나의 상황들에 으쓱해졌다.
그와 달리 반려인은 장난스럽게 “휴지도 마지막, 라면도 마지막, 마지막... 나도 마지막이라는 거 아닐까?” 마지막.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죽고 싶다고 말하는 존재니까. 나는 익숙하고 럭키하게 그 말을 받아쳤다. “마지막 사랑이라는 거지. 이제 다른 사람은 못 가지는 거지. 모든 게 다 내 차지가 되었으니까! 나 이외에는 가질 수가 없으니까!”
하나의 상황도 이렇게나 다르게 받아들이는 10년 넘게 서로를 알고 지낸 두 사람이다. 세상에 알맞은 정답이라고, 사람이라고, 사랑이라고 정의되는 지표에 속하지 않으면 올바르지 않다고 낙인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사랑, 나의 사랑, 반려인의 사랑은 항상 정의되지 않을 거고, 올바르지도 않을 거다. 누군가에겐 더럽고 무쓸모하고 의미를 느낄 수 없는 비유일지 몰라도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비유다. ‘똥 닦는 휴지 같은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