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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월 Jul 01. 2024

그대는 고도를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이틀 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고, 어제는 친구들과 이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책은 부조리 극의 대표 격인 작품으로 우리에게 우리 삶에 녹아있는 ‘고도’의 의미를 깊이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20세기 문학이 대체로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 많다 보니, 읽으면 읽을수록 삶을 이해할 것만 같으면서도 삶은 손에 닿지 않은 채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부조리’라는 관념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1. 줄거리

  책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두 방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앙상한 나무 밑에서 매일같이 ‘고도’를 기다린다. 그리고 에스트라공은 어제의 일을 망각하고, 두 사람은 방금 전 대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러나 고도는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오지 않는다. 다만 고도의 전갈을 전달하는 아이가 매일밤마다 어제 찾아온 기억을 잊은 채로 내일은 꼭 고도가 올 것이라며 고도의 말을 전해줄 뿐이다.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포조와 럭키라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한다. 럭키는 포조의 하인으로 둘은 50년 이상 함께 길을 나섰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포조는 럭키를 좋은 값에 팔아버리겠다고 말하는 럭키의 주인임에도 럭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포조에게 럭키는 애증의 대상인 것이다. 포조는 럭키가 없으면 모자를 쓰지도, 물을 마시지도, 길을 나서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2막에서는 오히려 장님이 된 포조가 럭키를 묶은 줄에 끌려 넘어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두 방랑자는 그들을 일으켜줄까 고민을 하고, 에스트라공은 돈을 요구한다. 포조는 200프랑, 400프랑을 외치며 돈을 올려가고, 블라디미르는 포조와 럭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에스트라공은 400프랑은 적다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블라디미르의 도움을 받은 포조와 럭키는 다시 길을 나서고, 두 방랑자는 어제와 똑같이 아이에게 내일은 고도가 꼭 찾아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내일을 기약하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2. 인물들에 대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며, 방금 전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그들에겐 어제의 기억과 지금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고도’이며 고도만의 삶의 목적이자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삶의 이유는 그들의 삶을 앗아가는 아이러니함이 드러난다. 포조는 시력을 잃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었으며, 에스트라공은 발이 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라디미르는 허리가 아파 마늘을 먹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인물에 비해 신체적 문제가 드러나고 있지 않으며, 어제를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리면서도 ‘애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작의 1막의 시작과 2막의 시작 모두, 블라디미르는 에스테르공을 만난 것을 반가워하며 껴안아주려 한다. 그러나 에스테르공은 이를 거절한다. 또한 2막에서 포조와 럭키를 도와주는 것을 돈으로만 환산하지 않는 블라디미르의 태도는 에스트라공과 대비가 된다는 점에서 근거를 들 수 있다.


  또한 나는 작품을 읽으면서 포조와 럭키는 두 방랑자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블라디미르는 럭키, 에스테르공은 포조와 결이 유사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55페이지의 포조의 회상에서 근거를 찾았다. 포조는 럭키에 대해 “전에는 착했었지.. 날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해 주었는데.. 지금은 날 못살게 군단 말이오..”라고 서술한다. 이를 통해 에스테르공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블라디미르가 럭키에 대응이 되지 않을까라고 예상했고, 125페이지에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포조와 럭키를 연기하며 노는 두 방랑자가 예상과 동일한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무언가를 위해 길을 걷는 그들 또한 어쩌면, 두 방랑자처럼 그들만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3. 우리는 고도를 기다려야 할까?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에서 드러난 것처럼 ‘고도’ 일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의미에 대해 작가 베케트가 자신도 알지 못하겠다고 발언한 것처럼 그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고, 추상적이다. 나는 고도의 의미에 대해 최근 내가 쓰던 소설의 한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희망과도 같은 내일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우리가 죽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막의 신기루 때문이다.”라는 내 소설의 대목에서 이는 작품에서 고도의 전갈인 아이가 내일은 꼭 고도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맥락이 유사하다. 우리는 목표가 좌절된 현실에서 또다시 작은 희망을 만나 그 희망을 믿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희망은 우리가 오늘을 희생하고 내일을 기다리도록 만든다. 점점 우리에겐 오늘이 없어지고, 지금의 순간이 없어지는 과정이다. 이는 위에서 말했듯 작중 인물의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다가올 내일을 바라보며 살기에, 오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도는 누군가에게는 신의 구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시작, 누군가에게는 삶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고도 자체가 ‘부조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도가 우리에게 온 순간을 꿈꾸고, 현실을 버린다. 마치 두 방랑자가 현실에서의 삶을 포기한 채 언덕에서 지내며 점점 건강이 악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부조리는 희망의 탈을 쓴 채로 인간을 서서히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뜨린다. 그리고 그 늪에 빠진 인간은 자신이 부조리 속에 있는지도 모른 채로 서서히 인간의 기능을 상실한다. 마치 포조와 럭키가 기억을 잃고, 시력을 잃고,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의 문지기 이야기 대목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는 문지기의 말에 그저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한 청년은 결국 죽을 때까지 그 문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방랑자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또한 카뮈의 <페스트> 또한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대중들이 페스트가 끝날 것이라고 낙담하며, 페스트의 종식만을 기다릴 때, 페스트의 확산이 정점에 도달한다. 이는 페스트라는 부조리의 끝, 즉 희망을 그저 기다리는 대중들은 부조리를 이겨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나는 희망과 부조리는 하나의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조리에 빠진 인간은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고민을 멀리로 던져버리는 철학적 자살을 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우리가 허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부조리가 희망을 탈을 쓴 것은 그 속에 희망의 면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희망은 내일에 있지 않다. 희망은 오늘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부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그들의 약점이다. 우리가 시선을 내일에서 오늘로 돌려 오늘을 살기 시작함으로써 부조리는 우리에게 달콤한 유혹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부조리 속에서 희망을 스스로 피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방법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블라디미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내 주위에 대한 관심과 ‘기억’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억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존재함으로써 부조리가 쓴 내일이라는 희망을 탈을 벗기고, 부조리 속의 진정한 희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고도’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고도’의 의미보다,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그대는 그대의 고도를 그저 기다릴 것인가. 그대가 고도를 이루어낼 것인가. 모든 선택은 그대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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