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1. 책소개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우리는 어떤 깊이를 느끼는가? 이 비유적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 이유는 그저 보일 뿐인 싯다르타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깊이감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깊이감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지는 모두 그대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은 싯다르타의 삶을 자세하게, 나의 해석은 핵심만 간결하게 기획하였다.
2. 줄거리
가장 높은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능력과 외양을 겸비한 싯다르타는 어느 날 세상 모든 것을 알더라도 자신의 자아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문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사문은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의식주에 연연하지 않고 열반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그의 아버지는 격하게 반대하였으나 싯다르타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여정을 허락한다. 또한 항상 싯다르타를 동경하던 그의 친구 고빈다도 함께 수행 길을 나선다.
싯다르타는 다른 사문들을 스승으로 삼고 자기 수행, 명상, 금식, 그리고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동물이나 물체에 깃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배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러한 수행은 결코 자신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길이 아니라며 사문일행을 떠난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부처가 된, 고타마를 만나게 되고 고빈다는 부처의 제자가 되어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하지만, 싯다르타는 부처의 경험은 가르침으로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며 부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로 나아가기로 한다. 이 길에서 싯다르타는 세상에서 홀로가 된 외로움을 느끼며 1부는 끝이 난다.
싯다르타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여정을 떠나던 중, 한 도시에서 아름다운 기생 카말라를 보게 된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에게 자신의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본다. 싯다르타는 그간 자신이 수행해 온 ‘기다림’, ‘사색’, ‘단식’을 이용하여 장사꾼 카마스와미의 동료가 되어 재화를 벌어들이고, 겉모습을 꾸며 카말라가 말한 조건을 하나씩 이행한다. 그렇게 그는 속세의 것들을 배우며 부자가 되었으며, 사랑을 배워 자신의 욕구를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사문의 모습이 아닌 속세와 쾌락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내면의 목소리는 서서히 희미해지며, 내면의 수레바퀴는 점점 느리게 굴러가 멈춘 듯 보였다.
그러던 중 싯다르타는 꿈에서 카말라가 새장 속에 아끼며 키우던 새가 죽자, 카말라가 그 새를 골목가에 던져버리는 모습을 본다. 싯다르타는 꿈에서 깨어나 지금 자신의 삶의 무의미함을 깨닫곤 곧장 도시를 떠난다. 그리고 그가 도시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카말라는 자신의 새장 속 새를 새장 밖으로 날아갈 수 있게 놓아주며,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는 여정길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고빈다를 만난다. 그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싯다르타는 오만했던 과거의 자아가 죽고,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또한 오래전 자신이 이 도시에 왔을 때, 자신에게 돈을 받지 않고, 강 건너로 운반해 준 뱃사공을 떠올리며 그 강가에 도착한다.
싯다르타는 뱃사공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그들은 오두막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저 강을 믿으며 살아가는 뱃사공과 살아가며 싯다르타는 과거는 없으며,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다는 깨달음과 강에는 세상의 소리가 모두 담겨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부처 고타마가 인간으로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카말라는 그의 죽음을 함께하기 위해 자신과 싯다르타의 아이와 길을 나서던 중 뱀에 물린다. 그녀를 발견한 뱃사공의 도움으로 카말라는 싯다르타의 품에서 죽게 되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이를 만난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을 거부하고, 오두막에서 도망쳐 길을 나선다. 싯다르타는 아이를 쫒으려 하지만, 뱃사공과의 대화에서 아이는 아이의 길을 가는 것이며, 과거에 자신이 떠났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는 아이를 쫒는 것을 포기하고 강 속에서 단일성을 발견하며 점점 부처에 가까워진다.
다시 한번 고빈다와 마주하게 된 싯다르타는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이미 부처의 형상이 담겨있고, 말과 사상보다는 행위와 삶을 통해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그러곤 깨달음을 위한 하나의 말을 갈구하는 고빈다에게 아무 말 없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자신의 얼굴 속에 세상의 모든 사람의 삶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며 작품은 끝이 난다.
3. 강과 미소가 말하는 것
이 작품에서 강과 미소는 많은 가르침을 준다. 강과 미소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속에는 모든 사람의 삶이 담겨 있으며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부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는 싯다르타가 고타마의 제자가 되지 않기로 결정하였을 때 한 말, “더 나은 가르침을 찾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더 나은 가르침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에는 이 깨달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하여 세상에서 소외감을 느꼈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하게 되었다. 이후 의식이 각성한 그는 세상 모든 것에는 자신, 부처, 그리고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자신의 오래전 깨달음을 자신을 넘어서 돌덩이에 이르기까지 세상 전체로 확장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부처의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는 미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부처가 말을 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 이유는 이미 그 미소 속에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와, 부처 자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삶이 담겨 있음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작품을 “싯다르타의 삶을 보고 우리는 어떤 깊이를 느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의 삶에는 나의 삶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삶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의 느낌을 직접 글로 전하고 싶지 않았다.
4. 길과 기억에 대해
이 작품에서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떠나자 새를 놓아주며,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이를 결국 놓아준다. 강에 담긴 각자의 삶은 함께 나아가다가도 각자의 길에 따라 갈라져 구름이 되기도, 폭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다시 만나기도, 다시 이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떠나보냄이 외롭지 않음은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의 속에는 떠난 이들의 삶마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두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1부의 끝에서와 2부의 끝에서의 싯다르타의 궁극적인 차이점이다.
이 책이 출판되고 20~30년이 지난 뒤에야 카뮈의 이방인, 시지프 신화,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과 같은 작품들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카뮈는 반항의 이후를 ‘사랑과 기억’으로써 끌고 나가고자 하였다. 또한 사르트르는 우리는 작품을 통해 존재하고, 기억될 수 있음을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앞서 이미 헤세는 ‘기억’에 대해 하나의 길을 제시하였다. 어쩌면 니체가 생각한 것처럼 우리가 우수하다고 인식하는 서양의 사상보다, 동양의 사상과 실천이 더욱 깊이감이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들은 언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속의 깊이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5. 실패와 아픔에 대해
전 편에서 다룬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종종 떠올랐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모순적인 관념을 하나의 과정 위에 얹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제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나온 유의어, 반의어 게임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성공의 반의어는 실패가 아니다. 실패는 성공을 위해서 필연적인 과정이니까. 오히려 성공의 반의어는 포기일 것이다. 시도를 포기한다면 성공은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이 있어야 이상이 있기 때문에 이상의 반의어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싯다르타가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속의 경험을 겪은 것도 필연적인 것이다. 부처의 깨달음과 세속의 가치 또한 정반대의 관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성공과 실패처럼, 이상과 현실처럼 하나의 과정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잠시 타락했더라도, 실패했더라도, 아픔이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절대 우리의 치부가 아니며 당연한 과정이라는 심심한 위로를 던져주기에 에세이가 순위권을 휩쓸고 있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