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남편의 말. 드디어 이 남자도 변하는구나. 갑자기 이 남자가 커 보였다. 항상 아이들과의 여행을 꿈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었고, 꿈쩍 않는 그였다.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과 친정을 간다면? 여행을 간다라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하는 외출은? 얼른 다녀오라고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고, 입꼬리마저 씰룩일 텐데. 어째서 나의 남편은 오히려 그 반대지?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주말뿐이라?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낮과 밤이 바뀐 일을 하는 남편. 그로 인해 모든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 시부모님을 챙기는 일은온전히 나의 몫이다. 바꿀 수 없는 생활의 패턴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투덜대기보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이다. 정오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오롯이 휴식을 취한다. 남편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자, 에너지 재충전의 공간이다. 나는 그 공간을 매일 가꾸고, 남편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한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남편은 집을 나선다. 때문에 지인들 사이에서 나의 별명은 ‘정오의 신데렐라’다.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들은 언제나 묻는다.
“왜 우리 아빠는 맨날 잠만 자? 언제 나랑 놀아 줘?”
수 없이 질문했고, 나는 대답하기 바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꼬마들은 모두 초등학생이 되었고, 평일에 함께 할 수 없는 아빠를받아들였다. 아이들은 커갈수록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했지만, 일이 바빠진 남편은 주말에 충분히 쉬고 싶어 했고, 다 함께 외출을 제안할 땐, 반응이 영 미지근했다. 남편은 점점 집돌이가 되어간다. 아이들과의 외출을 통해서, 남편은 오롯이 쉴 수 있는 시간을 얻고, 아이들은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는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외출인데, 무엇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
배려를 받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역시, 안 맞다. 남편의 주장도 일면 이해가 간다. 자기도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 중 주말뿐인데, 자기만 남겨두고 셋이 나가버리면 어쩌냐는 거다. 힘들까 봐, 피곤할까 봐 이를 악물고 배려해 준 사람한테 이건 배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앓을 때가 잦았다. 나는 누가 나만 집에 남겨두고 주말 내내 아이들을 안전하고 재미있게 데리고 놀아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힘들어도 꾹 참고 주말이면 애들과 집 밖을 빙빙 돌았던 건데, 그게 싫었다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지금까지도 속시원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랬던 남편이 무려 한 달씩이나 제주도 살이를 제안한다고? 이게 웬 떡이냐 싶었고, 오예를 외쳤다. 제주도 한 달 살이를 신나게 알아보던 중, 지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던 중이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은 꽤나 걱정이 된다고 했다. 남편 없이 혼자 하는 건 무섭고 두렵다고. 본인은 서툴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며. 더군다나 한 달 동안이나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 하고만 지낸 적이 없었다고. 남편 없이 혼자 하는 게 처음이라 무척이나 걱정된다고 말이다.
“남편이 제 애착인형이잖아요.”
라는 말로 뒤를 이었다. 문득 나의 남편이 떠올랐다. 이내 나는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음을 알아챘다.
아! 나는 남편의 애착인형이구나.
지금까지 남편은 나에게 수도 없이 NO! 를 외쳤고, 많은 부분에 대해선 여전히 그러하다. 퇴근 후, 나에게 온갖 짜증을 퍼붓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집에 없으니까.
애착인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니까.
애착인형은 자고로 마음의 안정을 주고, 위로를 주는 존재다. 그런 애착인형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불안하고 화가 났을까?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남편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기대 없이, 나의 욕심 없이 온전히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