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환각의 나비 중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지금 와서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사춘기 시절 고전에 빠져 살았던 기억이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고전을 읽는 친구와 친해던 나는 그 친구로부터 고전을 빌려 읽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폭풍의 언덕』**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있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어린 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지만, 영화의 유명세와 함께 이들 작가에게 매력을 느꼈다. 책들의 처음과 마지막을 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책들의 공통점이 이 작가들은 평생에 걸쳐 딱 한 작품만 쓰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나는 왠지 나도 평생 한 작품의 소설만이라도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나의 그릇의 크기가 많이 쓸 수도 없을 것 같았고, 가정 형편상 글 쓰는 사람으로 살기에는 내가 너무 가난할 것 같았다. 또한 글을 써서 먹고 살기에는 나의 재능이 너무 얕음을 감지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완서의 『환각의 나비중 그 가을의 사흘 동안』**를 읽으면서 이제 와서 왜 나의 오래된 욕망이 다시 되살아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 소설의 나는 젊은 날 성폭력으로 원치 않는 아이의 낙태를 하는 상처를 가진다. 그래서일까 , 나는 화냥기로 오염된 서울의 변두리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개업하여 낙태 수술로 30여 년을 보낸다. 그리나 병원을 폐업하면서 한 가지 소망을 가지는데 그것은 낙태가 아닌 신생아를 받아보는 것이었다.
30년의 낙태 수술이 마지막으로 생명을 받아보는 것으로 모든 죄의식의 면제부를 받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 낙태로 유명해진 병원에 아기를 낳으려 오는 사람은 없었고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폐업 마지막 날 성폭력으로 임신한 소녀가 찾아오는데 7개월이 된 태아였다.
고통스러워하는 소녀에서 자신의 모습을 느꼈고, 그 태아를 낙태를 시키려 했지만 낙태된 태아가 살아 있음을 안다. 그러자 나는 그 미숙아를 살리려고 애쓰지만 결국 죽어버린다. 나는 그 미숙아를 내 마당에 묻고 채송아를 심는다. 그러면서 나는 교회에서 통곡함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아기를 내 새 집 뜨락, 양지바른 곳에 깊이 잠재울 터였다. 나의 아이가 죽다니. 그러나 한 번도 아이를 못 가져본 여자보다는 아기의 무덤이라도 가진 여자가 훨씬 아름다울 것 같았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마음이 슬프면서 아팠다. 그 슬픔은 추하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미화되었다.
30년 동안 죽음을 다루던 여자가
마지막 순간에 **“살리고 싶다”**는 본능에 닿는 그 장면이
내 안의 오래된 욕망 — ‘한 편의 소설로 생을 남기고 싶다’ —오래되고 막연한 내 꿈과 겹쳐 보였다.
그녀가 한 생명을 살리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평생 다른 곳에서 헤매다가
그 오래된 꿈을 꺼낸 이유는 나도 한 문장이라도 살아 있는 문장을 남기고 싶어서 인가.
아니면 마지막에 내 삶의 합리화를 찾고 싶어서 인가?
내가 쓴 문장 안에서 누군가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덜 외로워지길 바라며.
어쩌면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그녀가 채송화를 심듯, 나도 내 삶의 한 자락에
내 맘과 가족, 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상처도 함께 보듬고 싶어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