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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여우 Oct 05. 2024

오늘 뭐 먹지?-권여선 음식 산문집-

<오늘 뭐 먹지?-권여선 음식 산문집> - by 권여선

  첫 아이를 임신하고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어릴 적 친정아버지께서 끓여 주시던 '김치라면'이었다. 푹 익어 말랑말랑 무른 김치와 살짝 익혀 꼬들꼬들한 면발의 어우러짐은 씹는 맛을 더욱 즐겁게 해 준다. 서로 다른 질감의 음식 재료들이 하나로 만나 ‘따로 또 같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맛의 풍미를 배가시킨다. 우리의 전통 식품인 김치는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고구마와 같이 퍽퍽한 음식을 먹을 때나 라면과 같이 느끼한 음식을 먹을 때 곁들이면 맛도 좋고 영양학적인 궁합도 훌륭하다. 라면에 잘 익은 김장 배추김치를 넣어 끓이면 맵고 짜고 신 김치의 맛이 국물에 깊게 우러나와 라면을 더욱 시원하고 진하게 만들어 주는데, 입덧으로 지친 속을 달래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여기에 김치가 지닌 정서적인 면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시 주재원이었던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던 나에게 한국인의 대표적인 소울푸드인 김치와 라면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는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먹는 것에 유난하다. 인사는 주로 “밥은 먹었니?”로 시작해 “밥 한번 먹자”로 끝난다. 먹방이 빠진 콘텐츠는 무미건조하다. 작가가 몸을 담았던 창작촌에서 조차 작가들끼리 만나면 대부분 먹는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에세이 중에서도 음식 에세이만큼 흥미로운 글이 있을까 싶다.


 문단의 애주가로 알려진 작가 권여선의 산문집 <오늘 뭐 먹지?>가 최근 <술꾼들의 모국어>라는 제목으로 개정 출판되었다. 음식 산문집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안주에 얽힌 작가의 추억 이야기이다. 제목에서부터 군침이 흐르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미슐랭 맛집의 요리도 아니고, 파인다이닝의 고급진 코스 요리도 더더욱 아니다. 순대, 만두, 김밥, 부침개, 물회, 냄비국수, 갈치조림, 감자탕, 어묵 꼬치, 꼬막조림, 오징어 튀김, 고등어, 간짜장 등 하나같이 우리네 일상 속 소박한 음식들이다. 서민들의 술로 불리는 소주에 어울릴 법하다. 밥을 먹을 때에 곁들여서 한두 잔 마시는 술을 반주(飯酒)라고 하지 않는가, 특별한 격식 없이 밥에 따라 나오는 국과 밑반찬들이 반주용 안주이다. 반주야 말로 ‘모든 음식은 안주로 일체화된다’는 술꾼들의 모토에 제격이다.


“모든 음식의 맛 속에는 사람과 기억이 숨어 있다. 맛 속에 숨은 첫 사람은 어머니이고, 기억의 첫 단추는 유년이다. 내 기억 속 꼬막의 맛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준 새꼬막조림에서 왔다”
(p.191. 솔푸드 꼬막조림)


 누구나 특정한 음식을 먹으면서 과거의 특별했던 기억을 떠올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감자탕을 먹으면서 자신에게 음식의 간을 보게 하셨던 어머니와의 추억을, 맛있는 감자탕을 먹이고 싶어 했던 남자친구의 애정을 떠올렸고, (그 국물 그 감자탕) 꼬막조림을 먹으면서 정반대의 식성을 가지셨던 부모님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을 기억했다.(솔푸드 꼬막조림) 김밥을 먹으며 이혼한 숙모를, (김밥은 착하다) 만두를 먹으며 대학 선배들과 분식집주인 부부를 생각했다.(만두다운 만두) 순대를 먹으며 편식이 심해 약골이었던 시절과 순대 덕분에 입맛을 넓혀가던 날들을 반추했으며, (라일락과 순대) 단식을 하며 죽과 젓갈의 ‘간기’를 통해 살아있음을 실감했다.(젓갈과 죽의 마리아주) 말린 나물을 먹으며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던 작은 언니를, (여름 나기 밑반찬 열전) 냄비국수와 고로케를 먹으며 일본 선박회사에 다니시던 아버지와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던 시절을 소환했다.(찬바람 불면 냄비국수)

내가 김치 라면을 끓여 먹을 때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비록 소박한 라면이지만 어린 자식들에게 손수 만든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회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음식의 어떠한 맛들은 특별한 감정과 연결되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특정한 음식을 마주하며 특별했던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맛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경험적인 것이며, 우리의 뇌 역시 맛을 인지하는 과정에 있어 이러한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미각과 후각뿐만 아니라 시각, 촉각, 청각의 오감을 모두 사용한다. 여기에 음식을 먹을 당시의 심리상태와 환경, 인간관계 등 다양한 경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기억은 더욱 강화되고 확장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서울 종로서적 1층에 위치했던 롯데리아. 종로서적이 거의 폐업할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은 하루 종일 흐리고 무거운 공기와 함께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홀로 큰 통창을 마주하고 앉아 따뜻한 커피와 비스킷을 앞에 놓고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던 그날의 모습이 지금도 빛바랜 스틸컷 사진의 한 장면처럼 남아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면 따뜻한 커피와 스콘을 소울푸드처럼 찾는다. 나에게 비 오는 날의 풍경은 종종 그렇다. 우울했던 날씨와 매장에 울려 퍼지던 음악, 따뜻한 커피잔과 향기로운 커피 향, 달달한 비스킷…. 당시 내 오감은 그렇게 작동했고 기억은 여전히 새록새록 더해가고 있다.


“각자의 혀에는 각자가 먹고 살아온 이력이 담겨있다. 그래서 혀의 개성은 절대적이며, 그 개성은 평균적으로 봉합되지 않는다”(p.151. 급식의 온도)

 

 맛의 기억은 개별적인 경험이기에 맛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모두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에게 순대가 편식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음식이었다면 나에게 순대는 결혼한 딸을 그리워하는 친정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유년시절에 각인된 맛의 풍경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유년에 그 음식을 먹던 방식이 그러하다.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 한 점을 얹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이다. 정말 이렇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밥과 무와 갈치가 어울려 내는 이 끝없이 달고 달고 다디단 가을의 무지개를. 마지막으로 게다리를 넣어 구수한 단맛이 도는 무된장국을 한술 떠먹는다. 그러면 내 혀는 단풍잎처럼 겸허한 행복으로 물든다.”(p.168. 가을무 삼단케이크)

 

 솥밥을 해 먹는 우리 집에는 밥을 하고 나면 늘 무쇠솥 바닥에 누룽지가 생긴다. 누룽지에 물을 붓고 푹 끓여 단짠단짠한 밑반찬들을 반드시 누룽지 한 숟가락에 얹어 한입에 먹는다. 차갑게 식혀도 뜨끈하게 데워도 맛있다. 간장계란밥을 먹는 우리 집만의 방법도 있다. 요즘에는 반숙한 계란 프라이에 들기름과 맛간장, 김가루 등을 넣어 비벼 먹는 간장계란밥을 요리 블로그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그 시절 우리는 따뜻한 흰쌀밥에 노란 마가린을 넣고 날계란을 깨뜨려 간장 한 숟가락 넣어 비벼먹었다.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를 모두 넣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계란 흰자가 밥알에 코팅되어 밥알을 더욱 찰지게 했던 식감을 잊을 수가 없다.


 미국의 요리연구가이자 셰프인 줄리아 차일드는 “인생이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음식을 구하고 소비하지만 인간은 더 나아가 먹는 행위를 통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먹는 즐거움은 인간이 느끼는 쾌락 중에 가장 문화적이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쾌락일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p.190. 솔푸드 꼬막조림)


 요리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과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음식의 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만들기까지의 수고로운 과정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음식을 먹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정성 때문일 것이며,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만큼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소통하기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지금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랜만에 김치라면을 다시 끓여 보았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달군다. 곧이어 김치의 새큼한 향을 가득 품은 라면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양은 냄비 뚜껑에 라면 몇 가닥 얹어 후후 불며 먹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친정아버지께서 끓여 주시던 그때의 그 맛과 같지 않았다. 이미 내 입맛이 변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감자탕집의 감자탕 맛이 변해 아쉬워하던 작가의 심정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오늘 뭐 먹지?”라는 고민은 단순히 끼니를 때우기 위한 고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던 때의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태도이기도 하다. 권여선 작가에게도 우리에게도 음식은 삶을 통찰하는 하나의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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