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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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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경 Jan 02. 2025

밀실

레드 캐벌리 라이딩 (1932) - 카지미르 말레비치



눈을 떠보니 거대한 밀실에 갇혔다. 공사가 끝나지 않은 건물의 한 층 정도 되어 보인다. 내가 앉은 소파는 나름 편안하다. 천장은 회색 콘크리트인데, 아직 마르지 않아서인지 물기에 젖어 보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문 하나가 보인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니 시계 하나가 보인다. 시계에는 숫자가 없었다. 시침은 대충 오른쪽을 가리키는 듯했고 분침은 대충 왼쪽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래, 세시 사십오 분 정도. 창문도 없고 조명도 없는 이 방은 이상하게 어둡지 않다. 은은하지만 소리치는 듯한 이 백색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빛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다. 빛은 이 방과 하나인 듯하다.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십이월이었던 것 같은데 일월이었던 것 같기도. 주머니를 뒤져보니 누가 훔쳐간 것인지 나의 핸드폰이 없었다. 시계도 있는데 달력도 어디 있겠지, 하고 다시 방을 둘러보니 시계가 걸려 있는 벽 밑의 구석에 낡은 달력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살펴보아도 저기에 며칠이라고 적혀있는지 잘 보이지 않아 생각해 보니 아, 내 안경. 시력이 마이너스인 나는 안경을 필요로 하는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안경이 어디도 없었다. 무릎을 꿇고 소파 밑바닥을 훑어도 안경이 없었다. 소파 사이에 끼어 있는지, 구석구석에 손을 넣어 보아도 안경이 없었다. 다시 소파에 앉아 앞을 바라보니 문 하나가 보인다. 아니, 문인 것 같기도. 뿌옇게 보이는 문 같은 무언가는 열려 있는 것 같기도, 닫혀 있는 것 같기도.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그래, 달력. 안경은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달력 같은 것이 놓여있는 구석으로 가본다. 가까이서 보니 이것은 분명히 달력이긴 한데. 달력에는 숫자가 없었다. 일월화수목금토 밑에 띄엄띄엄 그려져 있는 네모들에는 숫자는 없고 빈칸으로 가득했다. 월 옆에 색칠되어 있는 빈 공간에는 숫자는 없고 분홍색으로 가득했다. 원고지가 되어버린 달력을 넘기다 보니 총 열두 장이었다. 일 년엔 열두 달이 있으니 그래, 이것은 분명히 달력이다. 나는 달력의 마지막 장을 열고 걸려 있는 볼펜을 꺼내 분홍색 빈칸에 “12”라는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월요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요일이니까, 금요일을 정해 가장 위에 있는 빈칸에 “5"라는 숫자를 적었다. 이제부터 오늘은 십이월 오일 금요일이야. 지금은 십이월 오일 금요일 세시 사십오 분, 아니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분침이 조금 움직인 것 같았다. 지금은 십이월 오일 금요일 세시 오십 분이야.


시간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를 하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고개를 위로 올려 천장을 바라보니 콘크리트가 조금은 마른 듯했다. 문득 천장에도 콘크리트를 바르는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콘크리트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눈뜨기 전의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름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았다. 욕심이 많은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나는 부모님이 시키지 않아도 줄곧 내가 먼저 나서서 공부도 하고 대학도 가고 남들이 해야 된다고 하는 것들은 다 했다. 고등학교 때는 가끔씩 밤새워 공부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아예 끊는다거나 항상 책상 앞에 앉아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야 하는 것, 해야 할 의무—를 우선으로 삶고 살아왔다. 문득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게 열심히 산 것인지 시킨 일을 잘한 것인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 그냥 별 차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길 무렵 천장에서 회색 물방울 같은 것이 하나 떨어졌고 나의 안구를 강타했다. 이미 뿌옇게 보이던 밀실이 이젠 더욱 뿌옇게 보였고 저 앞에 보이는 문은 분명 진한 회색에 문손잡이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벽과 동화되어 사라져만 가는 것 같았다. 이것이 내 착각인지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문만은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나는 문의 실체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소파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밀실이 워낙 거대해서인지 문은 꽤나 멀었다. 안경이 없어서인가, 소파에 앉아서 바라본 문은 분명히 훨씬 가까운 것 같았는데. 그렇게 오분인가, 십 분인가를 계속 걷다가 또 생각했다. 그래, 시키는 일들 잘하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겠지. 사람마다 열심히 사는 것의 기준은 다르고 나도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어. 사실 고통스러운 적이 있었다고 해야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나는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저번 크리스마스였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러 한국에 돌아갔지만 새벽까지 일만 했을 때, 그래, 그때 꽤 고통스러웠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다가 저녁약속 나가고 돌아와서 또 일만 하던 날, 그래, 그때도 꽤 고통스러웠지. 고통스러움의 끝에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 그래, 열심히 산 삶의 끝에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온 나는 스물일곱 살이었던 것 같고 아직 하늘이 보기에는 어려서인지 내가 걷는 길에는 아직까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고통을 덜 느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더 고통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바닥을 보며 십 분인지 이십 분인지 삼십 분인지, 생각에 잠겨 걷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가까워졌을 것이라 생각한 문은 이상하리만큼 여전히 저 멀리 있었다. 밀실을 거대했지만 분명히 벽이 있었고 나는 벽을 만졌는데, 그렇다면 이 방은 분명히 유한한 것인데. 여전히 점처럼 보이는 문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니 시계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설마 같은 시계인가, 하고 뒤를 바라보니 소파는 분명히 저 멀리 있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아, 그러면 이것은 다른 시계일 것이고 나는 분명히 제자리걸음을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해 보려 다가가 확인해 본 시계는 이상하게도 시침과 분침은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히 적어도 삼십 분은 걸은 것 같은데. 움직였다고 생각한 분침은 여전히 위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고 시침은 여전히 세시와 네시 사이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이 시계가 고장 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시계를 벽에서 떼내어 손으로 분침과 시침을 움직였고, 다시 벽에 걸어놓은 시계는 이제 네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침이 위를 향하는 것을 보고 안도한 나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고, 역시나 시계 밑에는 달력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혹시나 싶어 달력을 확인해 보니 아, 역시 이 달력에도 숫자가 없었다. 일월화수목금토 밑의 네모난 칸은 비어 있었고 월 옆에 있는 빈칸은 분홍색만 가득했다. 나는 다시 옆에 있는 마커를 들어 “12" 라는 숫자를 분홍색 빈칸에 채워 넣었고 월요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요일이니까—그리고 아까는 금요일로 정했으니까—이번에는 토요일로 정하고 그 밑에 있는 빈칸에 “6”이라는 숫자를 채워 넣었다. 그래, 오늘은 십이월 육일 네시 정각이야. 일어났을 때보다 하루, 그리고 십오 분이 지난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한 나는 다시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언제까지 이 방에만 있을 수 있겠어. 사람은 같은 곳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는 한 시간, 두 시간, 거의 세 시간이 지난 것 같았고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보이는 문 같은 것은 도무지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다. 이게 말이 되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이제는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출발한 소파는 이제 보이지 않았고 사실 원래 소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거대해 보이는 밀실의 중앙에는 내가 놓여 있었고 사방에는 벽 같은 것이 놓여 있었지만 소파는 없었다.


혹시나 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래도 여전히 시계는 같은 곳에 있었고 그 시계 역시 세시 사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도 같은 시계가 아니구나. 왜냐면 나는 분명히 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래 그랬기에, 논리적으로 이것은 같은 시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방에 시계는 많고 모든 시계는 고장 나 있는 것이 분명해. 하지만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세시와 네 시 사이를 방황하고 있던 시침은 사실 세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고 네 시 사십오 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지금은 여전히 세시 사십오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 방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것이 영원이다.


그래, 나는 영원하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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