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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락여석 Jul 05. 2024

치킨을 튀기며

생명의 애처로움을 곱씹다




"나는 이미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 하는 물고기였으니" 

- 엠페도클레스, <카타르모이>





닭을 손질한다. 피비린내가 옅게 남은 생닭 다리를 차곡차곡 쌓는다. 찐득한 육즙이 손가락에 묻어 불콰한 감정에 젖는다. 닭들의 시체를 망연히 바라본다. 주문벨이 울린다. 치킨을 튀긴다. 튀김가루를 씌운 닭 조각을 기름통에 투하한다. 기름 냄새가 찌든, 추레한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집에 갈 채비를 서두른다. 




한계상황으로서의 치킨집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내가 선택할 수 없고, 변화케 할 수 없는, 인간을 한계 짓는 조건을 의미한다. 나에게 부여된 철칙이자 불변의 자연법칙처럼 부과된 한계상황은 치킨집이었다. 부모님의 파산 이후 길어진 실직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선택한 프랜차이즈 치킨집은 쉴 틈 없는 과중한 노동의 짐덩이를 가족 전체에게 안겨주었다.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인 시지프가 산꼭대기로 바위를 끌어올리는 영벌(永罰)을 선고받았듯이 일주일 중 휴일도 없이 닭을 손질하고 치킨을 튀기는 과정이 영겁회귀의 굴레처럼 끝없이 반복되었다. 나를 포함한 가족 전체가 치킨집에 하루종일 갇혀 있어야 했다. 기름 찌든 내에 익숙해진 나날이 이어졌다.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은, 부모님이 자영업자가 흔히 겪기 마련인 굽신거리는 모멸과 수모의 순간을 겪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을 거치며 마모되었다. 내가 결코 바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한계조건으로서 치킨집은 내 어린 시절을 짙은 회색으로 채색했다. 좋든 싫든 간에, 치킨을 팔아 번 돈으로 나는 내 연약한 삶을 지탱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의 일손을 도우며 치킨을 튀기던 중 불현듯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닭의 다리와 날개를 조물거리며 밑간을 하는데, 어째서인지 한 편의 잔혹극을 관람하는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이어진 생각은 뭇 생명의 애처로움에 관한 자각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돌연히 생의 굴레를 깨닫는 대오각성(大悟覺醒) 혹은 에피파니(epiphany, 顯現) 따위의 것이리라.




우로보로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우로보로스'라는 특이한 괴물이 있다. 우로보로스는 거대한 뱀으로, 자기 꼬리를 스스로 물고 뜯어먹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신화학자들은 이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한 시간 동안 먹고 먹히는, 반복되는 자연의 실상을 은유한 메타포로 이해한다. 우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삶의 영위를 목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죽이고 먹어치움으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조건 지어져 있다.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 미국의 신화학자)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피조물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어요. (...)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라도 그 재료는 조금 전까지도 살아 있던 것들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노라면 새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쪼는 것을 보게 되지요?  새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잡아먹고 있어요. (...) 뱀이 무엇을 잡아먹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원형질적인 삶의 모습에 원초적인 의미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 조지프 캠벨, <신화의 힘> 



어릴 적에 소파에 앉아 즐겨 보던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떠올려본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내리쬐는 사바나 평원이 눈에 들어온다. 유려한 곡선의 몸을 뽐내는 가젤 한 마리가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대지를 질주한다. 그 뒤로 냉혹한 눈매의 암사자 한 마리가 포효하며 달려오고 있다. 가젤은 있는 힘껏 야수의 공격을 피하려 애쓰지만, 결국은 붙잡히고 만다. 아아, 목을 노리는 집요한 물어뜯음에 가젤의 짧은 생명은 종결된다. 이런 류의 살생의 광경을 브라운관 화면 너머로 지켜볼 때, 적자생존 자연선택의 무참한 광경에 등줄기가 섬찟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경외심에 젖은 채로 장엄한 대지의 풍광을 관조하는 여행자에게, 흙더미 아래에서 포식자의 아가리를 피하려는 미약한 벌레의 몸짓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기실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에도 한 꺼풀 아래에는 섬뜩한 피의 드라마가 도사린다.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다. 우로보로스의 게걸스러운 입은 쉴 틈 없이 무언가를 먹어치우고 있다. 



연약하고 애처로움



타자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살아남음의 추문. 살아남음의 남루함과 비루함. 먹이를 찾아 아가리로 집어삼키는 원형질적인 삶의 본모습을 목격할 때, 원초적인 의미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매일 항상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 몰두한다. 점심 메뉴는 어떤 것을 고를지, 무슨 음식을 먹어야 미식가의 타이틀을 유지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을 하면서도 내 이빨로 잘근잘근 씹는 고기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살아 숨 쉬며 생생한 기쁨과 슬픔, 애착을 느끼던 한 마리 동물이었음을 자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할 텐가? 



학명으로 'Gallus gallus domesticus'라는 복잡한 이름을 가진 평범한 닭 한 마리. 약 8000년 전, 들닭이라 불던 꿩과 phasianidae 소속 동물이 길들여져 탄생된 오늘의 닭. 현재 지구에는 200억 마리가 넘는 닭이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짧은 일생 내내 비좁은 양계장에 갇혀 알을 낳는 기계로 취급당하다 폐기 처분되거나 도살되어 바삭한 치킨이 될 운명을 부여받는다. 수평아리는 알에서 깨어나고 곧바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이동한 뒤 '알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대형 분쇄기에 갈리는 최후를 맞이한다. 살아남은 다른 병아리들은 이제 평생 몸도 가누기 어려운 철장에 수감되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종국에는 뜨거운 물에 익사해 죽게 될 것이다. 내가 손질하던 닭들은 이 모든 과정을 겪었다. 이미 토막 난 그들의 사체를 바라보면 씁쓸한 탄식이 새어 나오는 걸 참기 어렵다. 닭뿐만이 아니다. 매년 10억 마리의 돼지, 10억 마리의 양, 13억 마리의 소가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은 후 우리들의 일용한 양식이 된다. 


거꾸로 매달려 목이 칼로 베어지고, 피를 뿜으며 비명 지르고 발작하던 돼지의 모습을 영상으로 처음 접했던 날이 떠오른다. 비록 잠깐이지만 그날 저녁에는 고기를 씹기 어려웠다. 



산스크리트어 카루나(karuna)를 번역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은, 고통에 대한 동정심에서 출발한다. 특정한 개체의 고통을 향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고통당하는 생명체, 즉 중생을 포괄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이 지상의 세계를 '사바세계'라 부른다. 산스크리트어 사하(saha)를 음역 한 사바의 뜻은 '참고 견뎌내다'이다. 번뇌 고통 투쟁으로 가득한 세계의 실상이 모든 유정적(有情的) 존재로 하여금 눈물을 삼키어 하염없이 견뎌내며 살아갈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불교의 자비는 이처럼 삶이 슬픔의 바다(苦海)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마음을 모든 존재를 향해 열어젖힌다.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자신의 저서 《실천윤리학》에서 우리의 도덕적 감정이 고려해야 할 대상은  '쾌고 감수능력이 있는' 즉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런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동물해방을 부르짖는다. 비록 모든 인간이 그의 도덕관념을 실천하기는 버거우더라도, 별 의식 없이 매일 먹어치우는 음식들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이것이 정말 옳은 행위인지 의심할 잠깐의 기회라도 제공한다면 그 자체로 값진 성과이리라. 



나를 지탱하기 위해 희생된 것들



삶의 의미를 찾아 번민을 거듭하던 나날이 있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구절이 있다. "자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가장 주요한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처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고까지 토로하지는 않더라도 음울한 목소리가 스테레오 돌비 사운드로 증폭되어 나의 내면을 지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음울하던 시절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이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07,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고뇌하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 강연을 했다.  그는 철학자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병든 영혼'과 '건강한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삶과 세계의 잔혹한 실상에 주의를 쏟는 경향이 있다. 쇼펜하우어를 생각해 보라. 후자는 세계의 충만함과 다양성에 주목하고 낙관주의를 유지한다. '이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하던 라이프니츠를 떠올리면 편하다. 어느 한 부류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두 무리들 모두 세계의 이면을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능숙하게 포착한다. 양쪽 다 특정 진리는 예리하게 관찰하는 반면 어떤 진리는 도외시한다. 나는 그중 첫째 무리에 더 끌렸다. 슬픈 얼굴로 저잣거리를 떠돌던 헤라클레이토스, 지중해의 바다내음을 즐기면서도 괴로운 표정으로 철학책과 다투는 카뮈, 쾌락이 즐비한 아버지의 궁전을 박차고 떠난 싯다르타에게 공감했다. 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큰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윌리엄 제임스의 구절을 읽고 마음에 고요한 파문이 일었다. 



"우리 삶의 토대가 된 수많은 생명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우리 역시 어느 정도 고통을 지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부여된다" - <인생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1895)



나의 연약한 몸뚱어리, 금방이라도 끊어질 우려가 있는 심장의 움직임과 잔잔한 숨결. 이 모든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왔는가. 내가 먹고 소화하고 배설한 다른 생명들에게서 왔다. 나는 그들의 시체를 우악스럽게 삼키어 하루를 살아낼 힘을 얻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짧은 생애를 견뎌내 왔다. 앞으로 마지막 숨을 내쉬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계속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리라. 돈을 벌어 내가 옷을 입고 몸을 뉘일 침상을 마련하기 위해 죽어간 닭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자면, 내가 왜 나의 삶을 멋대로 방기 하면 안 되는지 답이 나오게 된다. 



내 생명의 주인은 누굴까?/나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 생명은 공동명의다./나와 내 가족과 친구들의 공동명의다./나와 내 가족과 친구들의/ 도장을 다 받기 전에는/함부로 팔아치워서는 안 된다.



- 정철, <공동명의>



내 생명은 공동명의다. 나, 가족, 친구들 그리고 이에 더해 뭇 생명과 함께 공유하는 거대한 연결망의 일부이다. 서구에서는 외따로이 우뚝 선 독자적 존재로 해석하는 'individual'이 동양의 철학에서 탐구한 '관계' 안의 존재임을 인식할 때 삶을 용감하게 헤쳐나갈 힘을 얻게 된다. 상호관계성을 유념하는 과정 중 나로 인해 죽어간 존재를 기억할 기회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영국 철학자 길버트 라일은 자신의 논문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에서 말했다. 이론적으로 어떤 명제를 알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이론과 실천은 서로 전혀 다른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분석철학의 거두 비트겐슈타인도 말했다. '문제를 이해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논리 철학 논고) 날카로운 칼붙이에 찢기거나 가스총을 머리에 맞고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스러지는 동물들의 고통. 폭력과 강압으로 마비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고, 동정심으로 가슴이 아려온다. 



동시에 나는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쾌락을 포기할 결심이 없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놀러 간 캠핑장에서 바비큐를 굽는 충만한 순간을 저버릴 생각도 없다. 나는 고기에 상추를 싸 먹으며 죄책감이 몰려올 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모든 동물이 피식자를 집어삼킬 준비를 마친 포식자다. 당신이 그토록 귀엽게 여기는 고양이는 쥐를 순전히 재미로 죽이는 생명체다. 왜 나만 이런 죄의식을 감내해야 하는가?" 물론 스스로도 동의하지 않는 항변이다. 우습게도, 나는 이 짧은 변에 기대어 나의 육식 생활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 후일 우리의 후손들은 배양육이나 영양제를 씹으며 조상들의 냉정함과 끝 모를 잔악함에 하얗게 질려 회상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생명을 노예로 삼고 종으로 부리면서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 편의 노래를!



우주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은 각자에게 아픔을 선사하고 서로를 물어뜯고 집어삼킬 것이다. 나는 내가 죽고도 영겁의 세월 너머로 이어질 이 피의 제전을 기리며 씻김굿을 한 판 벌이고 싶다. 내 숨이 멎는 날, 나를 구성하던 원자들은 우주로 뿔뿔이 흩어져 다른 생명들을 빚어내는 찰흙더미로 쓰일 테지. 아, 나의 원자를 공유할 미래의 생명들. 그들은 얼마나 가없는 고통에 신음하다 마지막 숨을 몰아쉴 것인가? 


옛 페르시아의 어느 시인의 입을 빌려 노래나 불러줘야지.


오늘아, 일어나라! 너의 빛을 비춰라,

원자들이 춤을 추고 있다. (...)



이 모든 원자들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행복하거나 비참하며, 

당혹스러움에 전율한다.


- 잘랄루딘 루미(1207~1273) <원자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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