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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피지 Jul 18. 2024

배려하지 말것




배려(配慮)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다른 사람을 살피는 마음으로 듣기만 해도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피해를 끼치면 안된다는 교육을 수도 없이 받은 채 어른이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을것. 그로 인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서로 배려하고 예의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좋은 문화덕에 우리나라의 질서들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키우는 나 또한 아이에게 배려를 가르친다. 하지만 속으로는 아이가 한없이 다른 친구를 배려만 하다 자신의 것을 손해보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도 공존한다. 배려는 상대를 위함과 나의것을 지키는 균형이 갖춰져야 현명한 배려가 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아이들이 함께 노는 상황에서 갈등이 시작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아이에게 다가가 친구에게 사과하라고 가르친다. 어른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관계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잘못이 있으면 사과하는 것이 사회생활에 암묵적인 매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부족하거나 과도한 것 에서 시작된다. 




사례 1 놀이서에서 두 남자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 아이가 큰 트럭 장난감을 가지고 나와 신나게 놀고 있으니 다른 또래 남자아이가 와서 신기한지 만져본다. 트럭장난감을 갖고 있는 아이의 엄마는 다른 친구가 트럭을 좋아하는걸 눈치챘는지 자신의 아들에게 "oo야, 친구랑 같이 갖고 놀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4살 아이가 들을 리가 없다. 아이는 이미 자신의 놀이에 빠져있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친구의 관심, 엄마의 함께 놀라는 권유는 자신의 놀이를 집중하는데 방해가 될 뿐 더 이상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싫은 티를 낸다. 아이이므로 능숙한 방법으로 거절하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본 아이의 엄마는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사회성도 없고, 양보할 줄 도 모르는 아이가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더군다나 다른 엄마들도 보고 있는 그 상황에서 양보 안 하는 우리 아이 때문에 다른 엄마들 보기에 창피하고 얼굴이 후끈거리기까지 한다. 이번 기회에 아이에게 제대로 배려하는 걸 가르치기 위해 아이가 갖고 있는 장난감을 뺏어 친구에게 준다. 엄마의 그런 행동에 정작 장난감 주인은 자신의 장난감을 뺏기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사례 2 이런 과도한 배려의 경우는 직장에서도 볼 수 있다. 첫 입사 후 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신입사원 야기이다. 모든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열정'이 많은 시기이다. 하지만 그 열정을 오히려 내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훼방꾼이 되었다. 회사는 상하관계가 명확하다.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그것이 더더욱 심했다. 어렵게 취업을 했는데 상사에게 잘못 보여 회사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건 모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나의 팀장은 팀원들에겐 별로 관심도 없고 다른 팀 사람들에게는 매우 젠틀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 팀장은 다른 팀원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였고, 해결은 곧 팀원들의 몫이였다. 팀장이 요구한 일을 거절할 수 없던 신입사원은 다른 팀의 일을 처리하느라, 자신의 일은 퇴근시간이 끝나고도 야근하며 처리해야 했다. 팀장님의 과도한 배려와 신입사원의 과도한 열정이 합쳐져 정작 자신의 팀 일 처리에는 매우 비 효율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사례 1에서 바람직한 엄마의 방법을 이야기 해보겠다. 엄마는 아이에게 다른 친구랑 함께 놀고 싶은지 권유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아이가 그래도 거절의 표시를 했다면 아이에게 거절 표현을 하도록 가르쳐 줄 수 있다. "내 거야, 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혼자 놀고 싶어 친구야" 등의 표현이 될 수 있겠다. 물론 엄마가 가르친다고 해서 이렇게 젠틀하게 거절할만한 4살은 없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매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대처할 방법을 배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상대 아이가 상처받을까 걱정된다고? 상대 친구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친구가 자신의 장난감을 만지지 말라고 하면 만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상대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갖고 놀고 싶어 보여서" 트럭 장난감을 건네는 것은 그 아이를 위한 배려가 아니다. 


하지만 사례 2처럼 직장에서 신입사원이 상사의 요구에 거절하는 것은 놀이터에서 나의 장난감을 지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내가 4살로 돌아가 놀이터에서부터 거절하는 법 나를 지키는 법을 제대로 배운채 성인이 되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렇게 배우며 자란 성인은 극히 드물다. 또한 신입사원이라면 회사의 업무나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이건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도 자신이 더 이상 과도한 야근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용기 내어야 한다. 팀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해 다른 팀 업무 때문에 자신의 업무처리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지금 하고 있고 배우고 있는 업무에 조금 집중해서 역량을 키우고 싶다고 말이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팀장이라면 따로 면담을 신청해 공손하게 말하는 신입사원의 또한 거절할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잘 배려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감사합니다.", "oo 씨 덕분에 해결할 있었어요.", "어머.. 이아이는 어쩜 이렇게 배려를 잘해요? 엄마가 아이를 키웠네요." 이러한 칭찬을 듣고 기분 나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런 기분 좋은 말에 '나는 역시 좋은 사람이야'라는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에서 이러한 배려들을 지속해 나간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배려를 좋아할 것이라는 건 오해다. 나는 호의로 배려를 베풀었지만 상대가 그것을 부담스러워한다면 더 이상 배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이렇게 배려했는데 상대도 배려하겠지 라는 나의 기대가 어긋나면 상대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게 될 것이다. 이 서운한 감정은 나는 이렇게 배려를 많이 하는데 나만 피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으로도 연결이 된다. 이것은 진정한 배려가 아닌 '가짜배려'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가짜 배려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Are you really okay?"

"스스로를 돌보고 있나요?"


또한 말해주고 싶다. 

"먼저 자신을(자신의 아이를) 돌보라고, 그건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고"



내가 여기서 말하는 '가짜 배려'는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채, 남을 위한 '과도한 배려'를 의미한다.

가짜 배려를 하는 이유

1. 거절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2. 나의 욕구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3. 다른 사람의 기분이 신경 쓰인다.

4. 습관적인 배려가 몸에 베어있다. 

5. 관계를 망칠까 봐 걱정된다.




자신의 욕구와 마음의 안정을 무시하고 하는 배려는 '진짜 배려'가 아니다. 배려받는 누군가는 좋겠지만 자신의 마음은 썩어 들어간다. 또한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의 손해도 어마어마하다. 나의 욕구를 무시한 채 과도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을 채워나간 사람은 이미 내 그릇에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어 더 이상 나를 채울 수 없게 된다. 나의 마음에 먼저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의욕구로 채워나간 사람들은 자연스레 내 마음의 그릇이 커져서 다른 사람을 담을 수 있게 된다. 비로소 그럴 수 있을 때 '진짜 배려'를 할 수 있게 된다. 진짜 배려란 '나의 그릇'에 맞는 배려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된다고? 괜찮다. 그들은 당신의 배려 없이도 스스로를 잘 챙기며 살면 된다. 자신을 챙겨야 하는 책임은 곧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채워주지 않아 원망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자기가 챙기는 것이 건강한 정신의 법칙이다. 



나는 희망한다. 더 이상 사람들이 힘들게 타인을 배려하느라 자신을 방치하지 않길. 이 사회의 개개인이 자신을 먼저 돌본 후, 꽉 찬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피는 진정한 배려로 가득 차길.

가끔 뉴스에서 넓은 마음으로 이웃을 돕는 사람들의 뉴스를 볼 수 있다. 그런 뉴스를 보며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희망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돕는 게 아닌 정말 다른 사람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그릇이 큰 사람이 되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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