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가 더 힘들까?
올해는 내가 결혼한 지 11차 되는 해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던 내가 남편의 꾐에 넘어가 또 아무 생각 없이 결혼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우리에겐 두 딸이 생겼고 많은 시간을 거쳐 지금은 머나먼 미국땅에서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오기까지 시행착오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밥 먹듯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끔찍했던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행복하기 위해서 했던 일임을.
1. 결혼의 이유(결혼)
ESFP 부인
인생을 즐기며 한 치 앞의 계획도 없이 살던 나는 세상에 나 같은 사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체계적이고 계획적이고 똑똑하기까지 하다니 너무 멋진 거 아닌가. 더군다나 하루에도 수도 없이 감정이 오락 가락 하는 나와는 달리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고 일관성 있는 모습에 신뢰가 갔다. 이런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사랑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ESTJ 남편
항상 효율과 인생의 성공을 위해 쉴 틈 없이 살았는데 이 사람을 보니 왠지 모르게 나까지 단순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일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가 아무 생각 없는 이 사람을 보면 나도 덩달아 괜찮아지는 마법. 더군다나 감정이 ''효율적이다 vs비효율적이다' 두 개로 정의되는 나에게 풍부한 감정표현 소유자는 나의 마음까지 풍족하게 만든다. 아이의 대학교 학자금을 대기 위해선 최대한 젊은 나이에 결혼하는 게 효율적이므로 적어도 30살에는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 내가 책임질 대상으로 낙점!
2. 갈등의 서막(신혼)
ESFP 부인
남편은 자꾸 앞뒤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통에 재미가 없다. 즉흥대로 떠오르는 대로 당장 해버리면 그만인 일을 맨날 엑셀을 켜고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기 때문에 뭐가 됐던 잘 따랐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바로 행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점이 점점 답답해 온다. 맨날 그놈의 효율.. 최저가... 시간을 1분이라도 낭비하는 법이 없다. 다 같이 놀러 간 모임자리에서도 혼자 계속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한다. 그로 인해 나 또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냥 깔깔대고 같이 놀면 안 될까? 청소에 대한 갈등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사실 청소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저기 놓여있는 물건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나를 지적하는 느낌이 들어 점점 짜증이 난다. 무슨 얘기라도 할까 하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통에 정서적인 대화가 힘들다. 하 재미없다.
ESTJ 남편
아내를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 눈엔 해야 할게 산더미인데 눈앞에 어질러진 집을 보고도 항상 행복해 보인다. 처리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눈에 보여 도저히 즐길 수가 없다. 또한 여행계획, 집안의 여러 일정들에 대해 나만 신경 쓴다. 아내에게 여행계획이라도 부탁하면 '설마 이걸 계획이라고..?' 할만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결국은 내 몫이다. 아내가 기분이 나쁘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래야 고치니까. 더 잘 알아듣게 직설적으로 정확하게 이야기해 준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내 말이 틀린가? 맞는 말을 하는데 이게 잘못된 건가?
3. 조율(결혼생활)
ESFP 부인
결혼해서 함께 경제 공동체를 이루다 보니 남편의 소비습관에 대해 오랫동안 지켜봤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돈을 아끼는 모습을 많이 봤다.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렇게도 돈을 아낄 수 있구나를 배우게 된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소비를 생각 없이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속으로 '아..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에 놀랍다. 그래서 이젠 남편이 엑셀을 켜도 잘 기다린다. 또한 인생에 대해 조금씩 배워간다. 나의 순수함을 좀 잃긴 했지만 각박한 현실과 냉정한 세계에 대해 배운다. 나도 남편처럼 좀 이성적이고 끈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내가 집이 더러운 꼴을 못 본다. 매일 주방을 깨끗이 하고 물건을 바로바로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틈틈이 정서소통의 중요성도 남편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고 "내 말이 틀려?", "내가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면 잘 먹힌다. 꼰대 남편이 자주 쓰던 말이다.
ESTJ 남편
아내 말을 들어보니 효율만 챙기느라 감정적 소통이 부족하다는 점에 인정하게 되었다. 솔직히 아내말에 백 프로 공감은 안되지만 공감하는 척하는 대화들을 조금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외에 추가적으로 어떻게 애정을 표현하는지도 알게 돼서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다. 가끔 아이들과 깔깔대며 떠들고 있는 아내를 보며 행복감을 조금 느끼기도 한다. 또한 아내가 하고 싶다는 건 효율 따지지 않고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로 인해 계획도 예전처럼 철저하게 짜진 않는다. 회사일이 바빠서 시간이 없다. 하지만 그때그때 정해서 하는 여행도 가끔 더 싸게 먹힐 때가 있으므로 괜찮다. 아내는 내가 평생 함께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그것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질 것이다.
4. 잘 맞는 점도 있어요
ESFP vs ESTJ
MBTI 중 두 개(ES)가 맞는 우리. 내향인(I)과 외향인(S)이 만나면 당장 이번 주말에 나들이 가는 일들로도 싸움이 일어난다. 한 명은 집에 있고 싶고 한 명은 나가고 싶어 답답하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둘 다 외향적이고 새로운 것을 보고 하는데 흥미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계획문제로 다툼이 일어나지만. 현실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신기하게도 영화도 실화 바탕 영화만 본다. 가상현실 이야기는 몰입이 안되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N)은 자신의 상상을 늘어놓는데 다른 사람(S)은 공감을 못한다면 그것 또한 슬픈 일일 테니까. 다행이다.
5. 누가 더 힘들까요?
생각은 각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