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라는 말은 내가 그 누군가의 생각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의미로 쓰는 관용어구이다.
1. 생각은 머리에 존재한다.
2. 머리 꼭대기는 머리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3. 제일 높은 곳은 아래가 다 보인다.
이런 논리의 흐름일 테다. 애들을 키우다 보니 애들의 생각이 뻔히 보이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었다. 그런데 뻔히 보이던 아이의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선명도가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 첫째 녀석의 머리 꼭대기를 물리적으로 볼 수가 없다. 까치발 도움을 얻으면 겨우 볼 수 있을 듯하다. 녀석의 머리 꼭대기가 내 눈높이를 넘어서면서 첫째 머리 꼭대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녀석의 머리 꼭대기가 볼일랑 말랑할 그 시점부터 녀석의 사춘기도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머리 꼭대기가 보이지 않으면서 녀석의 생각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치 노안 때문에 스마트폰 화면의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녀석이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나 혼자 녀석의 생각을 오해하게 되기도 한다.
최근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녀석의 키 크는 속도가 부쩍 빨라졌다. 아마 애 엄마는 곧 둘째의 머리 꼭대기를 보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부모가 아이의 생각을 알기가 어려워지는 시기에 불안감이 생긴다. 물론 서로 대화를 잘해서 서로의 의견과 생각을 잘 나누는 이상적인 관계라면 다행이다.
최근 도서관에서 제목에 끌려 읽기 시작한 책이 있다. ‘50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원제: You and Your Adult Child)’ 한글 제목이 나에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이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의 육아도 어려운데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육아가 끝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부모의 평균 수명이 연장되고 아이를 낳는 나이가 늦어졌고, 아이가 직업을 갖기 위해 받는 교육기간이 이전보다 길어지면서 직업을 갖고 결혼하여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시기도 늦어진 덕분이다. 인류 역사 상 이런 적이 없었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길을 가고 있다. 머리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녀석들과 더 오랜 기간 동안 지지고 볶아야 할 운명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