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아프지만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님 사랑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 진도에서 태어났다. 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큰 섬이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학교만은 도시에서 다니고 졸업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철학 덕분에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여동생은 2학년이었던 해에 우리 자매는 큰 꿈을 가득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두 손을 꽉 잡고 부모님 곁을 떠나 광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광주에서는 이모네 가족과 함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모와 이모부께서는 우리 자매를 늘 염려하고 아낌없이 사랑으로 돌보아주셨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넓고 푸른 초원 위에 아름답고 따뜻하고 솜털처럼 부드럽고 든든했던 부모님이라는 기대고 비빌 사랑의 언덕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기에 그 큰 사랑이 얼마나 더 크고 소중한지 깨달았다. 우리 자매에게는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외로움과 서러움은 어린 두 자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처음엔 학교생활도 쉽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진도라는 지역이 생소하고 동화책 속 그림 같은 섬마을 풍경을 상상하던 친구들은 전학해 온 나에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진도에 계신 아버지는 군청 공무원이시고 엄마는 사업을 하신 데다 우리 집은 읍내에 있어 20분 이상 차를 타고 나가야만 바다가 보여서 바다와는 전혀 무관한 생활을 했음에도 아이들이 나에게 바다에 관한 질문만 쏟아냈기 때문에 관심받는다는 점이 좋았던 나는 신이 나서 거짓말로 질문들에 답을 했다.
“부모님은 고기를 잡으시니?”
“응”
“그럼 너희 집에 배도 있어?”
“응. 매일 배 타고 바다에 가서 고기 잡아”
“그럼 너희 집 마당에서 바다가 보여?”
“응. 집 앞이 바로 바다야”
“와~ 좋겠다”
“그럼 너희 집 마당에서 축구공을 뻥~하고 차면 바다로 빠지니?”
“응. 공을 차면 바다로 빠져버려”
나는 이런 질문을 하는 친구들이 이상하면서도 신기했다.
섬에서 온 아이라는 나에 대한 호기심이 한편으로는 즐겁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지만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 생활해 온 아이들은 섬이나 시골의 모습은 잘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진도는 1984년 진도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도시와 교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철선이었고 바람이라도 불어 그마저도 운항을 하지 못해 몇 날 며칠 발이 묶여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곳이라 낯선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인터넷만 검색하여도 전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유선전화기로 통화하면서 TV로만 정보를 얻었고 지도에서나 보았기에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나를 봤을 때 말만 통하지, 이상한 곳에서 온 이방인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친구들은 어느 날부턴가 나를 멀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왕따’였던 것 같다. 그 당시 남자 짝꿍과 나는 전교에서 키가 제일 커서 같은 책상을 사용하였는데, 짝꿍은 책상 가운데 선을 그어 내가 조금이라도 그 선을 넘어가면 변성기의 허스키한 음성으로 욕을 해대며 내 등을 세차게 때렸다. 나는 화가 났지만 내 편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괜히 싸웠다가 친구들이 더 싫어할 것 같아 속으로만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직공원 옆 KBS 광주방송국 견학을 간 적이 있는데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반에 1등을 하는 친구가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좋은 친구인 것 같다! 친하게 지내라”고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이후 나의 학교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 반뿐만 아니라 다른 반 친구들도 나에게 먼저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렇게 여러 명의 친구와 방학이면 편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내 짝꿍도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하다며 사과의 쪽지도 보내주었고, 책상 위의 굵고 선명했던 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정의 선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나는 많은 친구와 서로의 집도 왕래하고 함께 밥도 먹고 공부도 하면서 운동장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던 중 가끔 문방구에 친구들과 함께 있는 여동생을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나보다 학교생활을 더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안심했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갑자기 동생이 나만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따라다니는 게 귀찮아서 몰래 두고 도망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어린 동생은 더 힘들고 기댈 곳이라고는 언니뿐이었을 텐데 언니는 그것도 모르고 어린 동생을 돌보지도 않고 혼자 살겠다고 돌아다녔으니 착하고 이쁜 내 동생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하고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은 갑자기 부모님께서 광주에 올라오셔서 나에게 소원이 있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너무도 신나는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던 나는 당연히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엄마께서 여동생은 소원이 있다고 말했다고 하셨다.
“엄마는 맨날 나한테 공부 잘하라고 하면서 내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않지?”
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래서 너의 소원이 뭔데?”
하고 엄마가 묻자
“엄마랑 함께 사는 게 소원이야!”
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어린 동생을 너무 빨리 타지로 보낸 게 가슴 아프셨는지 동생을 3개월 만에 다시 진도로 데리고 가셨다. 물론 나에게도 내려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자존심이 진도로 다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에서도 여자아이 중에 내가 제일 키가 크고 몸집이 있어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괴롭히면 내가 나서서 혼내주곤 했는데 전학 가기 전날에도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의 고무줄을 자르고 나에게 키다리라고 놀리는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덩치가 엄청 큰 남자 친구를 힘껏 혼내주고는
“나는 간다!!”
하고 사물함을 들고 기고만장하게 나와서 광주로 전학을 왔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진도로 가게 되면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온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그 아이가 나를 괴롭힐까 봐 조금 겁도 났기에 동생만 내려보내고 나는 광주에 남았다.
그때의 선택으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광주에서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나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을 길러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릴 적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또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기에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깊은지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님도 어린 자녀들의 타지 생활에 더 마음 쓰이고 고민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오롯이 속으로만 간직한 채 눈시울을 적시며 광주로 가기 싫어하는 우리를 새들이 새끼들의 비행훈련을 위해 둥지에서 떨어뜨리는 것처럼 부모님의 포근한 품 안에서 떼어내셨을 것이다.
나의 아이들이 6학년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그 나이의 자녀를 둔 지금에 와서야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과 아픔을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어린 섬 소녀의 유학기는 이제 추억이 되어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힘들고 마음 아팠던 일들,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생활 모두 소중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