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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록명 Oct 11. 2024

우민화

그렇게 요란하지 않은 이십대를 보내던 중 추락사고를 당했다. 그 후유증이 대단했는데, 이십팔년만에 통증에서 해방되었으니 말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기보단, 육체가 정신을 지배했던 그 시절을 보내며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 원망이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신에게로 향했고 그에 관해 기록된 성경을 정말로, 그야말로 완벽하게 짜여진 허구투성이라는 증명을 하고 싶어졌다. 그 과정은 사뭇 기백이 넘쳐흘렀고, 그 누구보다 과감한 단어를 선택해가며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만난 책이 "종의 기원"이었다. 내 딴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기 전에 내가 먼저 확신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교롭게 그 당시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이 가히 뜨거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마침 집에는 왜 있어야 하는 지 몰랐던 1969년에 발간된  "종의 기원"이 있었고,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눈에 들어왔지만, 한문이 섞여 있는터라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책이었다. 짙은 오렌지색 하드카바로 된 책을 자기암시를 하며 읽었다.'나는 이해한다....나는 이해할거야...."

''개체'와 '변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즈음에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문장이 나왔다.


"우리의 사육환경에서 생기는 경미한 변이와 개체적 차이의 무한한 수와 또 그보다 낮은 정도로 자연계에 나타나는 그것과를 염두에 두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감수를 마친 후 출판했다는 말인가? 이게 정말 이해가 된다구? 점점 그리고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문해력이 그다지 부족하지는 않다고 자부해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해를 하고 있는 문장을 나만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양보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만 사고당해서 오직 나만이 아프고 불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이, 부당하고 이기적인 신의 심술때문이란 걸 증명해 보여야 했기에. 나는 나의 부족함을 책망하며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영어원서를 주문했고 94페이지 즈음인 제4장 자연선택부터 펴 보았다.

"Let it be borne in mind in what an endless number of strange peculiarities our domestic productions, and, in a lesser degree, these under nature, vary, and, how strong the herediatary tendency is."


'어? vary가 빠졌네?'

.

.'아...... vary가 빠졌구나...'


나는 순서대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놀라움에서 주저스런 의구심으로 말이다. 이건 이해하고 쓴 게 아니라 배낀 것 같다. vary 라는 동사가 있는데도 마치 다윈이 말도 안되는 문장을 썼던 것처럼 왜 의뭉스럽게 무마해 버렸을까? '무수하게 다양함을 염두에 두고' 라는 말을 '~그것과를 염두에 두고'로 쓴다는 것은 억지로 그리고 성급하게 마무리해 버리려는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너를 사랑해' 해야 할 말을 '나는 너를 그거해' 라면 이해가 되는가 말이다.  


영어로 된 문장은, 보기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한 문장이다. 감탄문인 이 문장은 'How 형용사 주어 동사', 'What a(n) 형용사 명사 주어 동사' 인 문장이다.

what a beautiful                    girl                                                     she                      is (정말 예쁜 아이네)

what an endless number of strange peculiarities our domestic productions vary in these ~

                                            명사                                         주어               동사

             무수히 많은           이상하고 특이한 것들

그리고

and, in a lesser degree, these under nature    는 부사구일 뿐이다.

           조금 낮은 정도로      자연계에


번역자로 나온 분은 국내 유수한 대학의 교수였기에 이 정도의 문장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인데, 번역이 이렇게 나온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첫번 째, 그 시대에는 영어자료가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에 물리적 시간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두번 째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웠던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어 번역본이 오역이 된 것이었다는 것이 내 추론이다.

그럼에도 내가 멈출수 없는 이유는, 알려주려는 사람의 태도때문이다. 책을 낸 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려주기 위함이고, 알려주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확실히 알아야하고, 충분히 검토한 후에 책을 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문제가 된 저 문장을 뺀다면, 종의 기원에 몇 번이고 나오는 가정문중의 하나인 저 가설을 뺀다면, 종의 기원이 과연 완성될 수 있을까? 작자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저 작자가 만약 질문을 받았다면 대답은 과연 되었을까? 과연 작자는 알고 쓴건가?


이 문장은 이해가 되면 안되는 문장이다.


이것은 알려주려하기보다는 과시하고 장악하기 위함이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은 아는 척 짐짓 외면한다. 그것은 '너희들은 말해줘 봐야 이해 못하는 분야야... 나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 너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 쌓여 있기 때문에 따로 설명해 줄 시간이 없구나. 미안하지만, 다음 기회에...' 하면서 태연한 척 자리를 회피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인 양 자책을 한다. 맞아...우리는 모르지만, 저런 단어를 썼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고차원적인 의미가 있을꺼야....


우민화의 시작이다.

암호라는 건 자기들끼리 그 집단내에서만 쓰는 용어다. 적대세력은 알면 안되는 비밀스런 표기이다. 그것을 만약 적대세력이 해독해버린다면 핵심이 무너지고 혼란스러워지며 결국엔 세력의 붕괴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경험적으로 알기에 그들과는 다른 우리만이 알아볼 수 있는 단어를 만들어 내곤 했다. 언어는 그렇게 변해왔다고 생각한다.'우리'라는 집단존속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이해가 되지않나? 적대세력을 따 돌린 후 이제는 집단내의 층위(hierarchy)를 유지하기위해 이 암호, 단어를 만들어 낸다. 총, 칼 없이도 나누는 법, 구별하는 법을 학습한 것이다. 그 층위나 계급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 계급소속이나 출신이 아니라는 반증이며, 해당 층위에 속한 그들에게만은 이것이 '유희'가 된다. 분명히 말을 하고 있지만, 알아 듣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즐긴다. 30여년전 국제화라는 명목하에 영어의 광풍이 일었을 때 영어를 한다, 못한다로 계층을 구분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는 스스로를 구속했다. 정말 심한 경우는 영어의 발음은 한국어 발음과 달리 단전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국영방송에 나와서 직접 기체조(?)를 시연하던 때도 있었다. 이보다 정말로 더 분한 것은 그런 멍청한 놀림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수치스러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려주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고 알려줘도 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들을 자책하기만 했다. 없는 죄를 스스로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들은 충분히 즐기며 그것을 상업화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독식해왔다.


그들은 그렇게 움직인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새로운 용어를 내밀어가며, 마치 새로운 기술이 나와서 우리의 미래를 밝혀 줄 것인양 자기들에게도 익숙치 않은 말을 늘어 놓는다. 그것이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다. 전통적인 우리말로는 '현학적'으로 통하고 속칭으론 '아는 척'이다. 똑같은 터키광석의 가격을 실수로 '0'을 하나 더 붙였더니 판매가 급증했다는 이야기처럼, 한글보다 영어를 그대로 써 버리면 좀 더 전문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영어를 쓰는 이유를 물어보면, 한글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란다. 몇 년전에 '니체'에 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과거에는 '철인' 혹은 '초인'이라 번역되던 것을 요즘에는 독일말 그대로 '위버멘시'라고 쓴다고 했다. 우리가 쓰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니 일견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은행창구에서 상담을 하다가 'CTA'라는 단어를 쓰길래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홍보성문구'라고 답하길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정부에서 조차도 한글을 놔두고 '테스크포스팀'이란 말을 자주 하지 않던가?우리말로는 도무지 표현이 되지 않는 내용이 거기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의도적인 뜻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알려주는 입장과 듣는 입장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설명이 없는 갑작스러운 전문용어의 출현이나 발화는 분명히 심리학적으로도 의도된 구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도 대화할 때 난감하면 그러지 않던가? "야, 그냥 그런 게 있어..."

알고보면 그들도 모른다. '있어빌러티'를 지켜야 하니까 말이다.

그 '있어빌러티'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수가 따른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선생님은 달을 보라고 말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우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바라볼 수도 있다. 시험을 보면 물론 틀리게 된다.

'우민화'의 치명적인 문제가 여기있다.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오해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오해하기 마련이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들의 충실함이 배신이 될 수도 있다. '에소테릭(Esoteric/ 비밀스럽게 소수만 아는 것 )한 것을 엑소테릭(Exoteric/대중이 아는 것 ) 하게 여길 수도 있다. (위의 문장에서 '달'은 에소테릭이고 '손가락'은 '엑소테릭'이다.)


결혼을 하면서 전세사기를 당했었다. 그 당시 무려 3천만원이라는 거금을 시원하게 날린것이다. 교장출신이라는 집주인을 과도하게 믿은 나의 잘못을 탓하며 새롭게 일어서기까지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을 잃어버려야 했다. 어리석었기에 담보잡힌 집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것도 그 이후에야 알았고, 빚이라는 것이 회복하지 못 할 정도의 궁핍함을 준다는 것도 그 일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뼈가 저리도록. 이가 갈리도록.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일견 납득이 간다.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우선 내 전세돈으로 자기 빚을 돌려막은 후에 여지가 생기면 회복해 준다고 생각했었을게다(적어도 양심이 있었다면 말이다). 그 입장에서는 말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독립법인들이 매일마다 이익이 난다면 이런 이야기를 왜 하겠는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주식값을 올리는 행위를 해야 자금을 돌린다. 공장은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도 매일! 멈추면 안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출을 일으켜야 돈이 순환된다. 그 수단과 방법중에, 결국에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이 있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래야 한다. 그들도 한 가정의 가장 아니던가? 옳고 그른것은 여지가 생긴 나중에 해도 상관이 없다. 등산이 아무리 힘들어도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닦아주지 않겠나! 생각해 버린다. 누구의 잘못인가?

법인의 입장에서는 이익이 아닌 수익이라도 발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펀드에 퇴직금을 넣었다거나, 자식들 결혼자금을 전부 날려 버린 경우가 너무나 흔하지 않던가? 도덕? 정의? 그것만 외치면 먹고 살 수 있나? 무리한 정보를 듣기 좋은 명사로 재편한 후에 슬쩍 흘려서라도 기업은 운영을 해야한다. 주식 애널리스트들은 상식이 없고 도덕성이 제로이기에 늘 오른다는 전망만을 하고 있는가? 그들도 생계를 유지하려면 담당 회사에 출입을 해야하는 데, 질이 좋지 않은 정보를 쓴다면, 해당회사에 출입을 할 수 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위 밥 줄이 끊기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두둔하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란 것을 독자분들은 아실 것이다.)

얼마전에 상품권을 남발한 법인이 파산되어서 낭패인 사람들이 속출한 가운데도 직전에 포인트를 다 써버리는 영악한 사람들도 있지 않던가?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런 사회에 사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정보를 모아야한다.

우리 선배들의 시대에는 정보를 얻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어서 지리적인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국가마다의 정보장벽은 없다시피하다. 이럴 때 요구되는 것이 적극성이다. 수동적인 태도로 누군가 알려줄 것이라는 기도만 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날은 분명히 올 것이다. 생각보다 늦게.

지식의 시대가 아닌 지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은 현명한 질문이라고들 한다. 대단히 옳은 말이고 그 길밖에는 답이 없다고 여긴다. 질문은 이제 모바일로도 가능하지 않던가? 요즘에는 '프롬프트'라는 말도 듣기 어렵다. 그만큼 AI 가 발전했다는 이야기이고, 나는 아직까지 AI에게 영어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잘못된 내용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의문을 가진 것은 너무나 쉽고 단편적인 내용 일 수 있지만 말이다.


우민화 세력인 그들은 여전히 친절하고 상세하게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의무란 걸 너무나 잘 안다.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끔찍하게 당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 용어를 쓰려면 우선 알고 정확하게 쓰자. 그렇지 않으면 '우민'이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나 그거 알아. '음'과 '양' 두가지의 에너지가 활동하는 걸 말하지!'라며 우쭐해 한다. 할루시네이션은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두 개가 아니라 질량을 말하는 것인데. 내가 모르는 것을 남이 안다는 것은 수치인가 보다. 그런데 왜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아는 척'만 하려 할까? 보통사람처럼 말하고 현명한 사람처럼 생각하라지 않던가?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한다. 그들이 말할때 내가 알아듣지 못하면 내 잘못이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음과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정보가 되고 그 정보가 권력이 된다는 것도.


명사가 다르면 역할이 다르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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