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짜장면과 바꾼 금팔찌
“언니! 언니! 악세사리 있는 거 다 꺼내봐!”
누군가 단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댄다.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한참 잘 자고 있었던 나를 깨운 건 하나뿐인 여동생 두나. 두나는 나를 깨우더니 내 화장대와 보석함을 들쑤신다. 난 짜증 섞인 말투로 “왜... 뭐 하는 거야? 아침 댓바람부터.”라고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두나는 갑자기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손 한가득 악세사리를 내밀며 말했다.
“얼마 안 되겠지만... 언니, 우리.... 이거 팔자!”
지금 우리는 경주로 간다. 경주는 일 때문이 아니라도 자주 놀라가는 곳이다. 경주는 100번도 넘게 왔다며 그만 좀 오자고 말하곤 했지만 막상 오면 좋은 곳이 경주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경주를 떠올리면 항상 행복했는데 오늘은 경주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미팅이 두려워서도, 결과물이 잘못돼서도 아니다. 어느새 회사 잔고가 제로를 뚫고 들어가 오랫동안 마이너스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대를 나와 토목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의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쯤 지났을 때 공대를 나온 내 입장에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라면, 사업은 경영학과를 나온 사람이 하는 게 맞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공사 현장에서 홍보관을 만드는 일은 그래픽 디자인 같은 소프트웨어와 목수나 시트공 같은 하드웨어가 결합되어 완성된다. 이렇게 현장 설치까지 완성하고 난 후 계산서를 발급하면 다음 날 아니면 적어도 당월에 회사 통장으로 입금이 되는 줄 알았다. 돌이켜 보면, 20대의 나는 사업도 이런 공정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직원들 급여, 사무실 임차료, 각 공과금... 정해진 날짜에 통장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돈은 많은데 들어와야 할 돈은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게 일쑤였다. 대기업에서 ‘기다리세요.’라고 말하면 난 어떤 대꾸도 못하고 전화기만 바라봐야 하는 신세였다.(지금 같았으면 내 사정을 먼저 얘기하고 어떻게든 최선의 방법을 찾았을 것이지만 20대 사업 초년생의 난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그 시절 수금이라는 것은 나를 점점 옥죄어 왔다. 대기업은 B2B로 전자 약정을 통해 전자 어음을 발생하기 때문에 대략 60일 정도가 지나야 난 현금을 100% 인출 할 수 있었다. 이건 그래도 그나마 낫다. 전자 어음이 아닌 종이 어음을 발행하는 곳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직접 가 어음을 받은 다음 소위 ‘어음깡’이라는 걸 해서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어음 할인을 하면 수수료가 떼이고 1금융이 아닌 2금융을 찾아가야 하는 불합리와 불편함이 있었지만 사업 초보인 나에겐 이렇게라도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에게 물품을 납품한 업체는 3개월씩이나 기다릴 수 없다며 하루를 멀다 하고 독촉 전화가 왔다. 급기야 어떤 날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던 조그마한 원룸에 거래처 사장이 직접 찾아왔다.
초인종 소리에 인터폰 화면을 보는 순간 ‘아... 오늘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겠구나!’라는 불안감이 몰려왔고 난 직원들을 잠시 밖으로 내 보낸 후 거래처 사장을 마주했다.
인사를 나룰 겨를도 없이 거래처 사장은 마치 갱년기에 걸쳐있는 사람처럼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이 떨리고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사장님... 진정하시고 잠시... 잠시만 앉으세요.”
라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는 원룸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차 키!!”
라는 한 마디를 내뱉더니 손바닥을 벌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있는 거라고는 컴퓨터 5대가 전부니 내 차라도 가져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사무실에 빨간 딱지가 붙으면 이런 기분일까?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쩌면 적지 않은 나이인 29살이었지만 그때의 어설픈 여사장인 내가 받아들이기엔 그 무게가 엄청났다. 다행히 부모님의 도움으로 차 키는 며칠 안에 돌려받았지만 내 사업체는 여전히 빈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선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이렇게 돈 한 푼 없이 경주를 갈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아 일찍 두나는 참 씩씩하게도 18K로 보이는 악세사리 몇 개를 집 앞 금은방에 팔고 돌아왔다. 대학 때부터 부모님께 학비 한 번 받지 않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강하게 큰 탓인지 두나는 마치 언니 같은 의연함이 있었다.
금은방에서 두나가 받아 온 돈은 6만 원이 채 안되는 돈이였다. 이 돈으로 우선 차에 기름을 넣어야 경주로 갈 수 있었다. 비록 우울했지만 우린 아직 젊다고 자위하며 즐거운 얘기들로 차 안을 채우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팅을 무사히 마치고 그날의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선을 지키기 위해 현장 사람들과 밥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점심시간보다 훨씬 일찍 미팅을 끝내려고 하지만 이 날은 미팅이 딱 12시에 끝났다. 밥 먹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나와 두나는 경주에서 부산으로 바로 출발했다.
“꼬르륵...”배탈이 나면 꼭 먹고 싶은 게 많다더니 지갑에 돈이 없어도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나와 두나의 꼬르륵 소리가 번갈아가며 울려 퍼졌다. 돈이 없으니 톨게이트 비용도 아끼려고 국도로 돌아갔다. 국도를 달리는데 먼 발치에 ‘손짜장’이라는 큰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손짜장!!!’
더 이상 돈을 쓰면 안 된다. 밥도 집에 가서 먹어야 한다. 하지만 나와 두나의 배는 눈치가 없는지 더 크게 울어댄다. 결국 우린 차를 세우고 남은 돈으로 손짜장 딱 한 그릇만 먹고 가기로 했다. 두 명이서 한 그릇. 이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지 않을까.
식당에 들어가 앉자마자 종업원이 물 잔 두 개를 가져와 주문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짜장면 한 그릇만 주세요. 저희가 좀 전에 뭘 먹고 와서 맛만 보려고 해요.”
라며 배고픈 거지가 배부른 소크라테스 흉내를 내듯 말했다. 종업원은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었지만 고맙게도 짜장면 한 그릇을 가져다 주었다.
누구나 이런 기분일까. 한 그릇 밖에 시키지 못한 짜장면이 아쉬웠는지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단무지와 양파까지 깨끗이 비우고 있었던 우리 자매. 난 아차! 싶었지만 요즘처럼 셀프 반찬이 아니었던 시대라 다시 채워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품위를 잃지 말자며 우아하게 치마를 휘날리며 나와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내가 왜, 대체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나? 난 얼마나 못난 언니이기에 동생에게 짜장면 한 그릇도 못 사주고 있는가? 지금도 손짜장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
누구 그랬던가? 젊음이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고. 정말 그때는 내 일에 대한 열정이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청춘들은 공감을 못 할 수도 있지만 또 지금의 나에게 청춘의 시간은 눈물 나도록 힘겨웠지만 청춘 그 자체가 그립기도, 부럽기도 하다. 참 찌질하게도 짜장면 한 그릇 마음놓고 사먹지 못했던 그때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