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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 May 15. 2024

제주에서 얻어 온 물음표

즉흥 여행이 불러온 즉흥 글쓰기.

  삼 학년 기말시험을 이틀 앞둔 토요일, 스터디 카페에 앉아 공부한 지 십 분 만에 홀린 듯 제주행 비행기 왕복 티켓을 끊었다.


  숨이 막혔다. 남들 보기엔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겠지만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제주가 떠올랐다. '가고 싶다' 세 번 생각하고, "간다" 작게 세 번 중얼거리고 나니 제주에서 이박 삼일을 지낼 때 필요한 모든 예약이 끝났다. 15번 책상 위에 놓인 뜨거운 내 17인치 노트북, 반쯤 자며 적어 알아볼 수 없는 법철학 필기 공책, 심이 뭉툭해진 오래된 연필을 한데 모아 가방에 꾸겨 넣곤 그대로 도망치듯 나왔다. 평소에는 힘들어서 겨우 가는 4층 빌라 자취방도 한달음에 올라왔고 잠옷 바지, 칫솔, 치약만 가방에 테트리스 맞춰 넣듯 더 챙기고 집을 나왔다. 남고 남는 시간에 하던 상상 중 하나인 '갑자기 제주로 떠난다면 뭘 챙겨가지?'를 무의식에 떠올려 나는 그대로 실행에 옮길 뿐이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에 내려 공항 가는 버스에 겨우 올라탔다. 마침내 공항에 도착해 버스 기사님께 고맙습니다." 하고 내릴 때 오늘도 퍽 즉흥적이라고 느꼈다. 야간 자율 학습을 도망쳐 바다 보러 한 시간 거리 해운대에 숱하게 갔던 고등학생의 나, 무슨 대화를 하는지 엿듣고 싶어서 무작정 수화를 배웠던 재작년의 나, 환기가 필요해 2년 기른 허리께 머리카락을 귀밑까지 단숨에 잘랐던 작년 어느 날의 나, 홧김에 니플 피어싱을 뚫으러 (지금은 빼버렸다) 버스 타고 두 시간을 갔던 이번 여름의 나. 크든 작든 뭐든 끌리는 대로, 꼴리는 대로 했던 나의 손에 내가 이끌려 오늘의 제주까지 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당장 내 앞에 닥친 것들을 하나씩 해치워가며 지냈다. 학업, 알바, 사람 관 계 등등의 것들. 요즘은 늦게 온 사춘기인지 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돼라'며 재촉하는 중이었다. 중이 제 머릴 깎지 못하듯 나도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쓰라림이 한편에서 자꾸 나를 찔러댔고 나는 뾰족한 수 없이 그 생각에 점점 더 빠져들기만 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길을 찾지 못하는 긴 사막 길을 걷는 것처럼. 푹푹 발이 빠지고 점점 무게에 짓눌려 무릎까지. 허리까지. 가슴까지. 결국엔 턱 끝까지 그렇게 깊게 빠져버릴 때 나를 끌어내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들이 찰나의 즉흥적인 선택들이었고 이번엔 제주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한 번 와본 곳이라 길이 눈에 익어 반가웠다. 제주에 혼자 떨어져 나와 어쩐지 설레기도 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먼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는 뜨거운 바람으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나를 갑갑하게 했던 내 안의 생각.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좋은 사람은 뭐였을까'하면서.

머리카락을 다 말리고 느지막이 술자리에 갔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다들 처음보단 한 템포 긴장을 늦추는 게 보였다.


  사진을 찍어 자기의 시선을 보여주던 친구(내가 성인 되고 만난 사람들 중 좋아하는 사람이다)가, 내 옆에 앉은 사 람이 글을 쓴다는 걸 무심결에 흘려 말했다. 작년에 처음 봤던 그 사람은 당시에도 대화 사이에 무언가 다른 느낌을 줬었던 게 기억이 났다. 글을 써서 그랬을까? 작년 제주 여행이 끝나고도 몇 번 그 얼굴이 떠오르곤 했는데 지금 제주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이번엔 좀 노골적으로 '이 사람 어떤 사람일까' 몰래 추측해 봤다. 힐끔 쳐다보고, 또 빤히 봤다. 다른 곳을 보면서도 귀는 그쪽을 향해 있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떤 말을 하는지 듣고 싶어서.


  대화를 기억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색에 비슷해지고 싶었다. 이런 감정인지 몰랐던 작년에도, 그리고 알게 된 지금도 나는 그 사람과 닮고 싶었다. 분명하지만 다정하고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그게 정말 부러웠고, 그렇게나 닮고 싶었다.


  궁금했다. 술자리가 끝나자마자 얼른 방에 들어와 브런치 앱을 다운로드했다. 작은 전등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그 글들을 읽었다. 전부 읽고 또 읽었다. 왠지 좋은 문장은 작게 중얼거리면서 읽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을 오늘 밤새 관찰했는데 글을 읽고 나니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 글을 쓰기 전까지 다른 글들을 얼마나 읽었을까, 몇 번이나 고치고 다듬어 내놓은 글일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작가를 좋아할까, 어떻게 사람들을 대할까, 요즘 어떻게 지내는 걸까, 어떻게 하면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렇게 자기 색이 묻어 나올까. 물음표만 가득 생겼고 내가 직접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 사람은 다음날 육지로 돌아갔다. 여기서의 며칠 기억을 가지고 다시 평소의 일상을 살아가겠다 싶었다. 이제 제주엔 없는 당신을, 어젯밤 술자리에서 나름대로 관찰했던 당신을 떠올리면서 다시 글을 읽었다. 그래도 어젯밤 떠올랐던 물음표들에 대한 답은 하나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처럼 글 쓰는 것에 힘을 쏟아 본다면, 당신의 색깔은 어디서 나온 걸까 하는 내 질문에 대한 어렴풋한 답과, 내 글 속에서의 나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너의 진심이 담긴 일을 나도 지금 당장부터 해보기로 했다. 여태 끌리는 대로 해왔으니까.


나도 나의 색을 여기서 찾을 수 있으려나 싶어서.

202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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