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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마 Nov 10. 2023

세 가지 결심과 하루 20매의 원고지.



  새해부터는 좀이 쑤셔도 책상 앞에 12시간은 앉아 있으려고 한다.


  그러려고 한다는 말이지 쉽게 되지는 않는다. 하루 반나절을 앉아 있겠다고 했던 결심이 무색하게 그 시간 동안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어느 밤의 지하철이었다. 부산의 지하철은 유독 구린 냄새 때문에 항상 멀미가 나서 내 작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의식한다. 그 대신 최근에 뭘 봤었던가 생각했는데 내가 요즘 관심 있게 읽는 작가(김연수)가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마침 오늘이었다. 곧 시작할 시간이라 늦지 않게 어플을 깔았다. 눈을 감고 라디오 소리에 집중하니 멀미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작가는 자기가 골라온 몇 곡의 팝송들 사이마다 짧은 이야기들을 했다. 아니 짧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가 길어졌다. 배철수 아저씨가 그 말을 끊고 일단 광고를 듣고 오겠다 했다. 야속했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그 짧고 긴 이야기는 이랬다. 매일 글을 쓰는데 질적으로 잘 쓰려고 하지는 않는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만 쓰는 날도 있는데 그런 건 훗날의 나에게 맡긴다. 적어둔 수많은 글들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다. 글쓰기의 시작은 쉽게 해야 한다. 다듬는 일이 더 쉽다. 글의 진행을 지켜보다 보면 글 자체가 스스로 발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 작가는 차근차근 말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하루키도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서, 정해진 양만큼의 원고를 써낸다. 는 내용의 글을 읽었던 게 떠올랐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찌 되었건 글쓰기라는 행위를 꾸준히 한다는 점이네, 7년째 매일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 나도 꾸준히 글을 쓴 걸로 쳐주나? 하는 의문이 스치듯 들었다.


  나의 올해 첫 번째 글은 새해에 더 다정한 사람이 될 결심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작년엔 그러지 못했고 올해는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애를 써보지만 다정할 결심은 언제나 쉽지 않다고 썼다. 다정함에 대한 생각을 왕왕 하다 보니 내가 언제부터 그런 인간이고 싶었나 했다. 18년도부터 지금껏, 매년 새해부터는 더 다정해지겠다는 글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 모습에 전혀 미치지 못했고 다정한 사람이 뭔지 당최 모르겠어서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 내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라디오 소리에 집중했는데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 그 작가가 말미에 한 이야기도 본인의 결심이었다. 올해를 시작하며 세 가지 결심을 했다. 첫 번째가 기분이 좋아질 결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면 나무를 찾아가서 그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한다. 두 번째는 다정할 결심. 깜짝 놀랐다. 나처럼 감정 조절 안 되는 풋내기 20대나 하는 결심인 줄 알았더니 다정해지는 게 올해 결심이라고? 그럼 어떻게 다정해지실 건데요. 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 작가는 상대방에게 경청하겠다고 말했다. 듣고 상응하는 공감의 말과 행동의 제스처를 취하겠다고.. 좀 전에 예전 남자친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말만 하는 거 같다. 이야기를 들으려고 해도 자꾸 하고 싶은 말이 불쑥 튀어나와서 조심하겠다. 너의 말을 잘 듣고 싶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또 내 말만 했나 싶어서 아차 했다. 사실 다정해질 방법은 막연했는데 나도 무의식 중에 상대방을 잘 듣는 것이 다정해지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걸까. 어찌 되었건 이 작가도 경청으로 다정해지려고 하니 나도 같은 방법을 써봐야겠다 싶었다.


  마지막 세 번째 결심은 길을 잃은 곳에서 새로운 것을 가져올 결심이었다. 대입을 실패하고 아주 어두운 곳에 빠져들었을 시절 그때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하려는 일이 틀어지려고 하면 반대로 무슨 새로운 일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고, 과거의 일이 우리를 규정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미래에 시선을 두면 현재는 가능성의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여전히 너무 어렵다. 과거는 무덤이고 나는 한참 동안 거기에 누워있었던 것 같다. 다하지 못한 숱한 결심이 나를 붙잡아 놓는 꼴인가 싶었다. 그 양이야 어쨌든 매일 글을 쓰려고 한다는 하루키와 김연수의 어느 결심이 결국 돌아보니 한 묶음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올해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다정하자. 잃어버린 것에 좌초하지 말자. 지금을 살라는 말로 다가왔다. 반절의 성공과 실패의 매일이 모여서 또 나를 이루길 바랄 뿐이다.



2023.01.06.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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