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과로사한 김과장, 일잘러가 되다. 1편
김민준은 아까부터 거슬리는 소리를 내는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은 오후 8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민준은 시선을 다시 모니터로 돌려 엑셀 시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제발 좀 살려줘라. 진짜 언제까지 해야 하냐......"
숫자들이 눈앞에서 춤을 췄다. 집중이 안 된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래도 내일 아침 9시까지는 끝내야 했다. 갑자기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민준의 아내 문자였다.
'저녁은 먹었어? 수빈이가 아빠 언제 오냐고 계속 물어봐.'
민준은 답장을 쓰려다가 지웠다. '곧 가'라고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르겠어'라고 할 수도 없고...... 결국 그냥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39살에 아직 과장...... 이러고 사는 게 맞나?'
동기들은 벌써 차장이 된 지 오래였다. 특히 같은 팀 박영수는 후배인데도 올해 차장으로 승진해서 이제 후배가 아니게 되었다.
"어? 민준이 형, 아직 안 가셨어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박영수였다. 외근 갔다가 고객과 식사를 한다고 했는데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회사에 들른 것이다. 늦은 시간이지만 박영수의 정장은 깔끔했다.
"응, 이거 끝내고 가려고."
"아, 내일 보고서요?"
영수가 민준 자리 옆에 서더니 모니터를 힐끗 봤다.
"아직도 하고 계셨구나."
"응? 뭔 소리야?"
"아, 그게..."
영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제가 외근 가기 전에 다 끝냈거든요?"
민준이 멈칫했다.
"뭘 끝냈다고?"
"그 보고서요. 형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시길래 시간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제가 따로 준비했어요."
"...... 그럼 왜 진작 말 안 했어?"
"제가 급히 외근 가느라 말씀을 못 드렸네요. 죄송해요."
영수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형 방식은 좀 오래 걸려요."
민준은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내 방식이 뭐가 문제야?"
"문제는 아니고요."
영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완벽하려고 하세요. 근데 김 부장님은 대충 80% 정도만 해도 OK 하시거든요. 100점 하나 만들 시간에 80점 세 개 만드는 게 나으니까요."
"......"
"아무튼 그래서 내일 아침에 제 자료로 발표하기로 했어요."
영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형, 이제 집에 가세요. 수빈이 기다리잖아요."
영수가 가고 나서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민준은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11년 동안 뭘 한 거지?"
매일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했다. 상사 말은 무조건 들었고, 후배들 챙기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야근은 밥먹듯이 하면서 후배한테 추월당하는 신세다. 민준은 가슴이 답답했다. 요즘 자주 이런 느낌이 들었다. 스트레스인지 과로인지 모르겠지만, 숨 쉬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시간이 문제다. 민준은 아내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나야."
"매일 왜 이렇게 늦어. 그래서 이제 출발하는 거야?"
"응...... 미안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하...... 저녁은 어떻게 했어?"
"아직 안 먹었는데 편의점에서 대충 사 먹을게. 수빈이는?"
"아빠 기다리다가 지쳐서 진작에 잠들었지."
민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그래."
"아무튼 빨리 마무리하고 들어와요."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이 나왔다. 딸이랑 제대로 놀아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맨날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미루기만 했다.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이야?'
민준은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늙어 보였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봤다. 수빈이 그린 그림이 배경화면이었다. 아빠랑 엄마랑 수빈이가 손잡고 있는 그림, 하지만 언제 그렸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왔다.
"으악!"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을 움켜잡고 벽에 기댔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다. 저점 시야가 흐려진다.
'뭐야, 이거...'
휴대폰을 꺼내려했지만 손이 떨려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곧 그 위로 민준이 쓰러졌다.
'아...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거구나.'
수빈이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가족들과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