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귀로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I’m shorter.”
연단에 막 오른 키 작은 남성이 스탠딩 마이크 높이를 낮추며 말했다.
20년 전 그러니까 아주 까마득한 옛날 통번역대학원 입학 전 근무했던 외국계 기업의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키가 2미터에 달하던 임원의 말이 끝나자 뒤를 이어 다른 임원이 연단에 올랐다. 단신인 그는 방금 연단에서 내려간 장신의 임원에게 맞춰져 있던 스탠딩 마이크의 높이를 낮춰야만 했다. 그러나 멋쩍은 상황을 서양인 특유의 유머 코드로 극복하려 한 그의 의도는 청중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연단 아래 있던 통역사가 “저는 짧게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결국 행사장에 있던 사람 중 소수만 웃었다. 키 작은 임원을 배려해서 차마 그대로 통역할 수 없다는 통역사의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연사의 의도는 통역 과정에서 사라졌다. 통역 과정에서 메시지가 누락되거나 오역되는 것, 통역사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다시 돌아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통역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못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왜 못 들을까? 인생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원인을 알아야 해결이 가능하다.
먼저 소음이나 기계 문제로 연사의 말이 통역사에게 가 닿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통역사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에는 들리지 않아서 통역을 할 수 없다고 마이크에 대고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들었는데도 그 의미가 와닿지 않았다면 그건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원인을 파악해 해결해야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들어도 무슨 뜻인지 선뜻 모르겠다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첫째,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있다.
둘째, 아는 단어인데 발음을 잘못 알고 있었거나 연사의 발음이 내가 알고 있는 발음과 달라 이해를 못 했다.
위 두 가지 경우는 해당 단어나 표현만 숙지하면 수월하게 해결된다.
그런데 세 번째 요인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바로 어려운 단어나 표현은 하나도 없는데도 전혀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경우다. 이건 독해력 문제기 때문이다. 들은 정보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능력은 독해력에 달려 있다.
눈으로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귀로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눈으로 읽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과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분석하는 행위는 모두 같은 인지 활동이다.
독해력만 있다면 설령 모르는 단어가 있다 해도 맥락에 비추어 충분히 그 뜻을 유추할 수 있다. 요새 말하는 문해력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독해력은 근육처럼 키울 수 있다. 텍스트를 읽고 핵심 내용을 논리적으로 압축해 보는 요약 훈련을 하면 된다. 읽지 않고 독해력을 키우는 방법은 없다. 독해와 텍스트 요약 훈련을 습관적으로 해야 한다. 독해력이 좋으면 요약을 잘하고 요약을 잘하면 문장 구사력도 좋아진다. 텍스트 요약은 혼자 할 수도 있고 여럿이 할 수도 있다.
신문 기사, 사설, 전문지 등 다양한 자료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학교 수업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최소 신문 사설 한 개는 매일 꼼꼼하게 분석해서 정독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사설은 제한된 지면에 주장과 근거를 설득력 있는 논리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분석 훈련에 좋은 자료다.
통역사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대부분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루어진 말이다. 추상적 개념을 담은 어휘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다. 책과 신문은 지식과 정보, 논리, 어휘력과 문장력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로다. 텍스트 요약을 꾸준히 하면 결국 문장 구사력도 좋아진다.
독해는 또 배경 지식을 쌓는데도 도움이 된다. 배경지식도 듣고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통역사는 외교, 정치, 경제, 사회 현안처럼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일상생활을 뛰어넘는 어휘와 문장 그리고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다양한 글을 읽고 논리를 분석하고 표현을 꾸준히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쌓이는 게 배경 지식이고 어휘다.
살아보니 이런 독해력과 배경 지식 공부는 통역뿐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요새는 날로 떨어지는 총기를 부여잡기 위해 예전 방식으로 필사와 암기를 종종 한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라. 푸석하던 뇌가 쫄깃쫄깃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