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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guardist Dec 31. 2023

인간은 어떻게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 Ⅰ

인간 존재론의 연역철학과 근대의 인간 존재론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이야기로 글을 열어보고자 한다. 1941년, 독일은 이전까지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을 침공하였다. 독일은 그 전까지 파죽지세로 전 유럽을 집어삼켰고, 소련 또한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독일군이 최종적인 목표로써 선정한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그리고 레닌그라드, 이 세개의 도시는 전부 함락의 위기에 놓였다. 

1941년,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기 위해 하나의 전략을 택했다. 바로 포위였다. 이 결정은 2년동안 레닌그라드의 운명을 좌우했으니, 바로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시작이다.

1941년 12월부터 시작된 포위는, 30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던 도시의 기능을 마비시켜갔다. 도시는 고립되었으며, 독일군이 모든 도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도시에는 어떠한 물자도 보급될 수 없었다. 유일한 수상 보급로였던 라도가 호수도 맹렬한 러시아의 겨울 날씨에 꽁꽁 얼어붙었고, 수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 포위로 인하여 레닌그라드에는 막대한 기아가 찾아왔다. 자그마치 3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사는 도시에 조금의 물자도 전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당연한 처사였다. 1인에게 하루에 배급되는 식량은 목숨을 이어가기에 너무나도 적은 양이었으며, 1943년 2년간의 봉쇄가 풀릴 때까지 추정치로는 대략 100만명이 아사했다는 통계가 존재한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유기체, 즉 동물이다. 이는 곧 인간이 동물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배를 굶주려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다면,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300만명이 고립된 레닌그라드는, 우리의 예상대로라면 결국에는 ‘서로의 의한 서로의 투쟁’이라는,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주장했던 것처럼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가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300명도 아니고, 30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명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내몰렸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역사는 반대로 흘러갔다. 포위 기간 레닌그라드에는 사회질서의 붕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 기능이 (어느 정도)정상적으로 작동하였고, 시민들은 의용군이나 의용소방대 따위를 조직하며, 매일 독일군의 거센 포격을 받는 도시의 피해를 복구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수준조차 기대할 수 없는 인구밀도 높은 도시에서도, 공동체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소위 ‘인간의 짐승성’을 보여주는 사례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종종 함께 설명되는 ‘식인 사건’이다. 사학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2,000건 정도의 식인 사례가 적발되었다. 더불어서 당시에는 식인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적인 강도살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검증되지는 않은) 이야기거리로 간간히 덧붙여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식인을 목적으로 살인을 하는, 소위 ‘식인종’에 대한 이야기는 과장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한 사례가 없진 않았으나, 열 자리를 넘지 않는, 즉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횟수였다. 대부분의 식인은 이미 죽은 시체나 신체부위를 거처로 가져와 섭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이 사례를 들어 내가 논의하고 싶은 것은 두가지이다. 



먼저, 인간적 존재적 가치론에 관한 고찰이다. 

인간은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 이 문제는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시작된 계기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철학사적으로 굉장히 많은 논의가 되어온 주제이다. 

인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동물이랑 다를 것이 없는 유기체이다. 유기체의 물리적 및 생리학적 원칙에 따라, 인간은 에너지를 섭취하고 소비하며, 그 생존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인간의 신체적 제반요소는 결국 인간에게 있어 특정한 상황에서 동물적 선택을 강요한다. 위에서 언급한 ‘레닌그라드의 식인종’이라는 하나의 예시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선택은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왔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을 가지는 점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을 변혁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어떤 동물도 자연이라는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그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합목적적으로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을 변혁시키는 힘 –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고도화되는 두뇌구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유기체의 틀에서 한층 나아가, 고등동물이라는 질적 전화를 이끌어내었다. 이로써, 인간은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전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써 세계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 자연을 변혁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점까지는 도달했지만, 이 사실 자체에서 인간의 어떠한 존재론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연을 변혁시키는 인간의 힘은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일차적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러한 물질적 기반을 합목적적으로 변혁시키는 과정에서 그 자기자신도 변혁시킨다는 것이다. 변혁되는 환경을 반영하는 인간의 정신.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은 자연을 변혁시키는 과정에 있어 그 자신의 정신적 구조도 질적을 전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최종적으로는 공동체적 사고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사고라는 정신적 사회구조는 일차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물질적 자기존속을 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더욱 고도화된 철학적 사유와 체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사유하는 인간적 가치란 결코 선험적인 가치가 아니며, 이러한 물질적 반영에서의 인간적 사고에서 비로소 비롯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란 인간이 물질적 토대를 발전시키고, 그 토대에 대한 정신구조의 반영에 있어 구성하는 공동체적 구조에서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천부인권과 같은 인간의 가치론은 결국 그러한 물질적 토대와 인간 정신구조의 변증법적 대립에 있어,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질적 전화의 과정으로써 생성되었다고 이해하면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인 접근과 분석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고찰을 여기서 끝낼 수 있고, 이것이 현존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분석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겠으나, 아쉽게도 지금까지의 분석은 반쪽짜리이다.

어째서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은 인간 가치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적 분석이라는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것이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을 영유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인간적 가치라고 하는 것은 체감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변혁시키는 것은 주체적이다. 하지만 인식의 주체적 변혁이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독립된 관념적 과정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은 사회적 의식을 반영하며, 사회적 의식은 곧 물질적 제반사항, 즉 토대를 반영한다. 이러한 체계에 있어 결국 주체적 인식은 사회적 의식, 바꾸어 말하면 공동체의 의식을 반영하며, 결국 공동체의 주체성이 탄생할 때, 인간 의식도 그것을 반영하여 그 자신의 주체적 변혁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돌려보자. 정리하자면 인류는 생산과정을 통하여 토대를 형성하고, 그것에서 한층 발전된 공동체적인 사회적 의식을 키워 나가며, 그 주체로서 인류 자신의 가치를 도출한다. 주체성을 가진 공동체적 구성체로서의 인간. 이것이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길이 되었다. 




두번째 고찰은 여기에서 생겨난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공동체적 인식이 탄생하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 근대 부르주아 시민사회를 형성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의 인간 가치론은 공허한가?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류에게 있어 진정한 주체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최종적 주제, 바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문제이다.

상기한 고찰에서처럼, 후천적인 인간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주체성의 형성은 아직까지 완전치 못하다. 

근대 사회에서 인류의 역사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주체성을 가진 역사였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운동과 같은 근대 시민혁명을 통한 인간의 주체성의 확립.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류는 전근대의 봉건적(신학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가치라는 의식으로 인식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이러한 부르주아 혁명은, 결국 대중에게 '자유인'이라는 사탕발린 말 아래, '착취당할 자유'를 인민 대중에게 부여했을 뿐이었다. 고대 노예제 사회와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의 노예와 농노와는 달리, 인류의 표면적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분명히 한층 질적 전화를 이룬 의식의 발전이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진정한 변혁을 이끄는 주체라는 면에서 아직 노동대중은 불구와 마찬가지였다.

물론, 인류는 이전의 역사와는 달리 몇몇 상황에서 분명히 자신의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상기의 레닌그라드의 예 또한 그 중 하나이다. 물질적 제반사항으로 볼 때 극악의 환경에 처해지더라도, 그 보다 한층 질적으로 전화된 인류의 사회의식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사회질서와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었다. 그 이유는 당대의 사회적 전제조건으로서 그들이 거시적인 상황을 결국은 강요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역사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비록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우애'의 정신은 결국 껍데기에 불과하였으며, 인류의 대부분은 자본주의, 나아가서는 제국주의 상부구조의 힘 아래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된 것이었다(비록 러시아 혁명을 비롯하여 다양한 지역에서 그 상부구조를 항한 대중의 주체성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인류 - 노동계급은 결국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발전된 자본주의 - 제국주의적 상부구조는 결국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며, 반 세기에 걸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그것이 사회의 전 물질적 제반사항과 일자원적 환경을 분해하고 파편화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특질을 가지는 것인가?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만이 그 자신을(자본을, 혹은 이윤을) 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핵심 원칙은 여전히 건재하나, 더욱 질적 전화를 거친 상태가 되었다. 이 원리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근대의 주체성, 즉 표면적 주체성과 착취당할 자유라고 하는 것은 근대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핵심적 요소이다. 자유인과 사적자치의 원칙이라고 하는 근대의 대원칙은 자본주의 사회의 근저 인식, 사회적 의식을 지배하며, 인민 대중이 체화(體化)된 자본인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자유롭게 인식되도록 한다. 동시에, 자본(혹은 그 체화된 존재인 자본가)는 끊임없이 생산과정에서의 모든 요소를 세분화, 단순화하며, 그러한 생산과정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노동 대중을 그 생산과정에서 소외시키게 만든다. 이러한 원칙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위시한 그의 위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상기한 원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원칙으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으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 원리는 단순히 생산과정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의 모든 부문 : 일상의 모든 물질적 소비, 대중매체, 예술, 성적 소비(관념적인 부분이나 물질적인 부분이나), 그 밖에도 사회 전체를 망라하는 생산과 소비로까지 확대된다. 생산양식(소비양식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수도 있으나)은 자본주의 구조에 의해 끊임없이 ‘분업화’되고(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세분화되어 생산되고 공급된다. 

이러한 물질적 생산양식의 전 세계적 지배는 사회의식, 이데올로기적 관계, 사회적 조직에 반영된다.  사회적 인식의 자본주의적 분쇄는 사회 전 영역을 구석구석 파편화한다.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세분화되고 원자화된다. 

반면 그 대립으로서 물질적 효용, 소비, 쾌락을 우선순위로 두는 일차원적 존재로서의 수렴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 존재의 사회적 인식은 동질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구성체로 확대되어, 사적자치의 질적 전화인 쾌락의 일방적 추구라는 인간 동질성의 원칙과 사적 개인의 원자화와 파편화는 적대적 모순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마르크스가 밝힌 ‘인간의 의한 인간의 소외’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관계에서의 소외도 또한 현대적으로 전화한다. 양적 측면과 물질적 요소만을 사고의 본질로 삼는 사고와, 극도로 단순화되고 분화하는 물질적 토대에 따른 원자적 인간성. 이러한 인식적 대립물의 결합은 착취라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요소를 각 개인에게 보이지 않게 만들고, 사회 전반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서, 나아가서는 그 자체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을 체면화시킨다. 

인민 대중의 총체적인 사회적 인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작은 공동체, 지역사회, 나아가서는 국가와 국제적 규모에서의 집단적인 착취는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서,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써 변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물신성, 비뚫어진 물질문화적 이상에 대한 추구는 점점 더 괴상한 형태로 변해간다.

우리의 기나긴 여정은 이제 마무리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인간 본성을 추구하는, 자연을 변혁하는 주체로서의 사회적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쾌락과 물신성, 그리고 그 합체된 화신인 자본주의적 문화에 자신을 바친다. 또한 사회체계에 내재된 착취를 이제는 인식할 수 없게 되며, 원래부터 태초에 존재하였던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개인은 파편화되었다. 공동체적 주체성을 가진 역사성은 찾아볼 수 없다. 주체성을 아름다운 형태로 파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열적인 톱니바퀴는 이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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