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대한 짧은 고찰
현대 사회에 하나의 개인으로써 살아가는 나는,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철학,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체감하고는 한다. 단순한 나 개인의 의견이기는 하나, 현대사회에 있어 철학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근대 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이론은 그 근본을 따지자면 자유주의 철학이다. 정치학적 원리에서, 근대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천부인권을 기반으로 한 만인의 평등(수평적이고 형식적인)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상응하는 근대의 주요 담론인 자본주의 근대경제학이 근본적으로 상정하는 것은 자유로운 경제주체로서의 개인이다. 이에 더불어, 근대 법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사적자치의 원칙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계약자유의 원칙이라는 각 개인을 상정한 근대적 자유주의를 제 1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21세기 이후의 현대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단편적이고 기계론적인 측면에서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 근본 원리로 삼는다. 모든 것을 상품화 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하는 사회. 그로 인해 탄생하는 무차별적인 자본의 확대가 하나의 원칙으로서 칭송받는 사회. (철학적으로 말하면 20세기 사회구조의 변증법적 질적 전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내가 제일 근본적인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자유로운 선택과 천부적 인권의 객체 및 주체인 각 개인'이라는 것은 결국 철학적 담론에 기반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것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러한 자유주의 원리라는 것은 하나의 공리로써 사용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수행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좋게 말해 순진하게 여겨지고, 나쁘게 말하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적 상품화로 알맞게 포장된 기계론적인 쾌락에 대해, 사람들은 어떠한 통찰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누리는 것 자체는 쉬운 것이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피하게 된다.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 사고의 빈곤이라는 현실과 기계론적 쾌락을 누리는 다른 하나의 현실, 두개의 현실의 모순을 애써 무시하려는 자기기만을 깨부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구조는 다시 근본적인 고찰에 대한 무시를 낳는 것인데, 이것은 악순환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문제에 대해 윤리학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특히 개인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이는 두드러지는데, 21세기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이란 결국 쾌락의 추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은 더욱 쉽게 보이곤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윤리학적 측면으로의 귀결도 결국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윤리학적 측면에도 결국 인간 존재에 관한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떠한 근저에서 윤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 그것을 추구해야 하긴 하는 것인가? 이는 윤리학을 너무 단순화 시킨 것이긴 하나,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이다. 결국 이 문제에 있어 윤리학은 반대로 그 자체가 주체가 되지 않고 객체로서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사회에 모순이 있다는 것은 일견 분명한 것인데, 표상적 성찰로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결정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것까지 고찰의 범위를 깊혀가고, 그 근저에 도달하여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방법론이 인류에게 선물해준 위대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