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예술관념론
예술에는 사상성이 필요할까.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아니오'로 답할 것이다.
예술의 사상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선, 현대 사회에서의 예술에 현상태에 대해 정립해 볼 필요가 있다. 조금 이상할 수도 있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대중 예술가'는 엄청난 수익을 얻는다. 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먼저 '공급과 수요'. 당연히 수요에 따라 대중예술은 생기고, 그에 따라 예술가들이 때돈을 버는 것은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술가의 예술작품으로 인해, 경제요소를 구성하는 개인의 노동의욕이 상승해 사회 전반의 생산성이 향상된다면, 이는 또한 경제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들이 큰 수익을 얻는 것은, 단순한 수학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작품의 사상은 전혀 상관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은 '비사상성적 분야'이다. 즉,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예술은 사상성과는 전혀 무관해야 한다.
*주: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담론에 의거하여 예술을 설명하는 많은 이들의 사고는, 후자에 미치기는 커녕, 전자와 같은 고찰에서 그 논지가 다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상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도 상품이 되고, 노동도 상품이 되며, 그 정신적 성질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적 자본주의관에 기초한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보자.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원리 혹은 레토릭에 의해 현대 사회에서 큰 부를 얻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예술의 상품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소위 말하는 'Flex'를 SNS에서 자랑하는 것은 그 좋은 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은 다시 물질적 대중문화를 이끈다. 예술이라는 것이 결국 물질적이고 상품적인 측면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연예계 뉴스나 황색신문 및 잡지에서 연예인의 가쉽거리를 연일 쏟아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연예인' 조차 상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점점 세속화되가며, 자극적이고 선동적이며 선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성질을 점점 발전시킨다. 소비하기 쉬운 성질로서의 진화도 이루어진다. 넷플릭스, 유튜브같은 플랫폼의 출현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화는 단지 '단순한 소비'만을 위한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예술의 현주소에 대한 논의는 이정도로 마치고, 본제로 들어가보자.
먼저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 (혹은 문화. 하지만 예술은 문화에 종속되는 개념이지, 동일 개념이 아니라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하다)의 본질에 대해 논하지는 않겠다.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상 불가능할 뿐더러, 이 글의 논지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예술의 성질과 그 위치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술의 사회 내 위치관계에 대해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그 훌륭한 설명이 되줄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예술은 상부구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완벽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술은 하부구조에 종속된 관계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 관계에 가깝지만). 선술한 예술가의 SNS의 예시는 이를 완벽히 설명해 준다. 예술과 하부구조는 (전자의 후자에 대한 종속적 관계가 강한) 상호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상기의 사고에서, 우리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결국 예술은 상당 부분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즉, 사상과 예술은 둘 다 상부구조이며, 상호적 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은 하부구조에 의해 어느 정도 종속적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다. 정리하자면, '예술'은 상부구조이며, 이는 결국 하부구조에 의해 종속관계를 가지는 '사상'과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사상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를 하나의 예시로 살펴보겠다. 한 연구에 의하면, 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출연진의 인종 다양성이 높을수록, 그 수익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은 돈이 된다' 라고 한다. 하지만 더욱 깊게 파고들어보자. 정치적 올바름이 왜 수익성을 창출할까?
이는 하부구조의 체제성에 기인한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하부구조로써의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일견 평등하게 보이게 만듬으로써, 그 평등 또한 상품화시킨다는 것이다. 카진스키의 논리를 빌리자면, 체제는 인종차별과 여성차별과 같은 '가상의 적'을 만든다. 이러한 가상의 적은,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소위 '반항'을 이끌어, 분노를 해소시킨다. 하지만 실은, 그들의 행동이 사실은 반항이 아니고, 깊은 의미의 순응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표면적인 '반항'은, 체제 내부의 마찰점을 줄여, 자본주의 토대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예술이 사상성을 지닌다는 것에 대한 논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다음 주제인 사상성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논해보자. 그런데 이상하다. 사상성이 존재하면 존재했지, 그것의 필요성을 왜 논해야 하는가? 이는, 예술의 분야에서도 변증법적인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예술도 다른 어떠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와 같은 모순을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 사상성을 지니는 것을 확인했으나, 실은 이는 정(靜)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예술이라는 분야 자체도 하부구조와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여기서 예술의 그러한 정적인 사상성은 모순으로써 작용한다.
현대 예술에서의 주된 모순으로써, 현대의 체제는 이러한 예술의 사상성을 '없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현대의 사람들은, 대중문화가 어떠한 사상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현대의 자본주의와 그 상부구조로써의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기둥이, 많은 면에 있어 '중립성'을 포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우리가 이러한 근현대적 사회구조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예술의 사상성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하부구조의 변혁에 있어 예술의 사상성은 이러한 모순을 타파할 수 있다. 사상성을 조종함으로써, 예술은 동적 존재가 되어 하부구조에 대한 영향력을 투영시킬 수 있음이다. 사회 변혁을 위해서는 사상가나 정치가가 예술에 대해 사상성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술에 사상성을 투영시키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특필해야 할 부분이다. 스탈린 통치 하에서, 소련 예술의 사상성은 분명히 크나큰 방향성을 가졌다(스탈린 통치기의 소련 예술의 사회주의 현실주의적 사조). 하지만 스탈린 시기 소련 사회의 무차별적 테러리즘과 통치 규범의 마비는, 예술을 무비판적인 교조주의로 몰아넣었다. 쇼스타코비치를 위시한 많은 소련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을을 일정한 사상성에 투영시켜야만 했고, 이는 '상부구조'로써의 예술의 역할을 거세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규범없는 사상성의 강요는, 예술의 변증법적 운동성을 제거시켜 버렸다.
결론적으로, 토대의 변혁적 발전을 위한 노력이 선행될때야 말로, 예술의 사상성은 그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