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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밥 Oct 15. 2024

곰국.

가끔 떠올리는 기억


오른손 손바닥엔 아직도 깨알만 한 벌침이 들어있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아프다는 게 정확히 뭔지도 모를 때다. 80년도엔 도심 조경 사업의 일환으로 길가에 꽃들이 즐비했는데, 분기별로 종류도 바꿀 만큼 환경 변화신경을 쓰던 때다. 때문에 나비나 벌 메뚜기나 방아깨비에 비해 시시한 곤충에 들어가 버렸다. 오히려 땅강아지 같은 녀석이 제법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생긴 게 귀엽고 손 위에 올려 주먹을 살짝 쥐면 두더지처럼 앞발로 헤치고 나오는 촉감이 으뜸이었다. 메뚜기목과 인데도 앞발은 영락없는 두더지과다. 두 가지 이상이 합체 한 뭔가 곤충계의 오리너구리 같은 느낌이랄까. 식물이나 작물의 뿌리 등을 갉아먹고 살아 해충으로 분류된다니 좀 안타깝지만 예전과 다르게 요즘 도심에선 거의 볼 수가 없어 그저 그리울 따름이다.


요새 아이들은 땅강아지를 알까? 똥강아지에 다른 이름쯤으로 여기려나?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아마 똥강아지라는 표현 자체도 생소할 거다. 물론 똥과 얽힌 의미로 강아지를 빗대 쓰기도 하지만 그 역시 알진 못할 것 같다. '비글'이나 '비숑프리제'라면 모를까.


어쨌든 각설하고, 어느 날은 그 많은 나비, 벌 중에 내 것 하나가 없다는 게 속상했는지 벌 한 마리를 두 손으로 와락 감싸 쥐었었다. 1차원적인 소유욕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쪼그마한 녀석이 어찌나 매정하게 쏘던지. 아프다는 게 뭔지 깨닫고선 엄마한테 달려갔지만 벌침은 된장과 함께 한 몸이 버렸. 지금도 된장만 아니었다면 거짓말처럼 쏙 하고 빠지진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덕분에 오른쪽 손바닥을 볼 때마다 그날이 재생되는 재미 하나건질 수 있었다.


아팠던 기억은 잔병치레라는 모둠으로 한데 묶어 도 하나하나가 잘 잊히지 않는다. 그게 사건이건 팔자건 말이다. 어릴 때 큰 병 한 번 앓지 않은 이가 있겠냐만, 고뿔에도 끙끙대는 요즘을 보면 확실히 지금보단 아픈 시대에 살았던 것 같다. 나 또한 제법 이름 있는 병마를 업고 컸으며 내려놓기까진 많은 기억들을 겪어야 했다.




가난보다 더 지긋지긋 한  곰국이었다. 




호강에 초치는 소리지만 당시 비위가 살얼음 급이라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정말 곰을 달여서 만드나 . 곰국의 '곰'은  '기름지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기름지게 고아서 끓여 낸 국이나 탕을 의미한다. 내가 마시던 곰국은 오로지 소뼈만 가득 넣어 만든 뼛국에 가까웠다. 물론, 알고 난 뒤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꾸리하고 메스꺼운 첫맛이 끝까지 지속되는 딱 상상하던 곰 맛 같았으니까. 요즘처럼 뽀얗게 끓여 낸 품격 있는 뼛국과는 전혀 다른 진하고 누르스름한 탕약에 가까운 맛. 코를 부여잡고 마셔도 냄새가 스며오니 찰나에 꿀떡꿀떡 넘기지 않으면 흐름이 끊겨 고생을 사야 했다. 끈적이며 붙어버린 입술은 혀로 재빨리 구멍을 내줘야 콧구멍을 열지 않게 된다. 자칫하면 토악질 후 처음부터 다시 마셔야 하는 불상사가 생겨버린다. 없는 형편에 비싸게 고아 낸 걸 몽땅 쓸어 닦아야 하는 불상사까지.


곰국을 마시는 이유는 단순했다. 뼈가 좋지 않아서. 벌침에 호되게 당한 지 1,2년쯤 지났을 때다. 아픔이 제대로 각인된 건 걷지 못할 만큼의 문제가 찾아와서다. 뼈에 생긴 문제로 병원치료 외에  곰국을 마시기로 했다. 칼슘을 비롯해 이런저런 좋은 영양분이 들어있지만 뼈와 관련한 과학적 인과관계가 두터운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엔 '뼈는 뼈로 고친다'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큰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거기에 심리적인 플라세보가 더해져 회복을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다. 곰국만큼 잘 먹어야 하는 게 '마음먹기'였으니까. 


에 있는 영양분이 다 녹아서 빠질 때까지 푹 끓여 낸 국은 다시 한번 진하게 우려내야 한다. 뼈가 흐물거릴 만큼 반나절을 녹이고 나면 숭덩숭덩 구멍만 남은 뼈가 드러난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잡념이 사라진다던데. 어머니는 그 긴 시간 동안 잔고민은커녕 굵은 고민들을 함께 끓이고 계셨을 것이다. 어쩌면 자식이 못 걷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모든 부모가 그럴 테지만 자식이 아프면 탓은 본인이 쥐게 된다. 가난과 건강이 더해지면 탓도 배가된다. 가난의 연민을 자식의 건강으로 보는 것 같아 더 측은해한다. 


완성된 곰국은 따로 간을 하지 않는다. 느끼하고 끈적이는 그대로 몽땅 비워낸다. 몸속으로 들어가 뼈에 착 들러붙길 바라며 기대를 간 삼아 몇 날이고 몇 년이고 탕약처럼 복용한다. 재밌는 게 옆 집이 한약방이었는데 늘 약재 달이는 냄새와 함께 곰국을 삼켰던 기억이 난다. 이 정도면 이것도 탕약인 것처럼. 어쩌면 탕약보다 더 효과가 좋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금도 물론 고가지만 그때 한약 값은 우리 형편엔 어림도 없었다. 그저 냄새가 새어 나올 때면  '지금 저 한약재는 얼마나 달이는 중일까..' 하면서도 '우리 집 곰국보단 멀었겠구나' 하고 피식거릴 뿐이었다.




4,5년쯤 됐을까. 한약방도 곰국도 이젠 사라졌다.




말랑살이 아직도 말랑거릴 때지만 뼈는 제법 튼튼해졌다. 이전엔 할 수 없던 걷기며 달리기에 하루 온종일을 쏟아부었다. 곰국은 더 이상 끓이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한약방도 이사를 가게 됐다. 나에겐  탕약 같은 곰국 정도로 추억에 박혀있지만, 어머니에겐 삶의 습관처럼 함께 끓인 걱정들이 고스란히 배어버렸다. 불안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이제 평범함만 남아 보이는 지금도 그때를 힘들게 기억해 내는 건 그 때문이다. 어릴 적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혹여나 평범한 웃음들이 지금의 불안한 기류에 영향을 끼칠까 봐서다. 마음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이래야 마음이라도 편해질까 싶어서.


어머니는 이후로 음식을 하실 때면 대자 양은 국통을 자주 사용하곤 했다. 김치찌개나 된장국, 미역국 등은 4,5일 양으로, 카레나 짜장 같은 건 일주일은 너끈도록 준비됐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음식 투정은 부리지 않았다. 주일 간격으로 바뀌기만 내심 바랬을 뿐.


그때 내 건강이 나아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주방 한편에선 아직도 뭔가가 끓어오르고 있으려나? 글쎄. 아픔을 벗어난 기억은 웃으며 뱉어내면 그만이지만 지속되는 아픔은 '기억'에 공간이 아닌 늘 '지금'이라는 공간 속에만 살게 되니.


어쩌면 곰국 우려내는 소리가 집 안 가득 퍼지는 가장 큰 소리가 되어 있을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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