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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밥 Nov 21. 2024

우산.

가끔 떠올리는 기억


언제부턴가 이유 없이 우산이 좋았다.




2000년 초겨울쯤 부산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별 목적은 없었다. 바람맞이 내지는 맛난 식사정도. 나름 맛집에 찾아가 허기도 채우고 간만에 친구 녀석을 불러내 거친 수다에 술도 한 잔 꺾었을 거다. 


기분도 알싸한  눈 맞은 강아지처럼 발발거리고 돌아다녔다. 난 이상하게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늘 사람 북적이는 곳에 발길이 가 있다. 직도 이유는 모르지만 나름 괜찮다. 


녀석이 토박이였던 터라 줄곧 녀석 뒤만 쭐래쭐래 따라다녔었다. 한 시간쯤 돌아다녔을까. 기왕 왔으니 해운대나 가자고 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막상 가보니 사람들로 적거렸다. 맥주 두어 캔을 집어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찬기운이 느껴졌지만 푸석하진 않았다. 마침 여리게 노을까지  겨울 바다를 느끼기엔 최상의 하모니였다.


맥주 한 캔에 묵힌 기억들. 추억들. 엷은 미소. 그렇게 수다로 부산을 피우다가 슬쩍 우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별로 좋아 보이지도 않은 검은색의 허름한 구식 우산이었다. 그리고 그 우산 속엔 어림잡아 여든은 돼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낡은 한복에 웅크리고 앉아 여리게 지는 노을을 앞두고 겨울 바다를 오롯이 보고 있었다. 주름이 깊게 파이긴 했지만 고운 얼굴에 가지런히 빗은 머리가 예뻐 보였다.


무슨 일일 생각도 채 하기 전에 부석 하게 수염도 깍지 않은 할아버지 한분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아직 따뜻함이 어 보이는 모래 한 줌을 쥐고 뭐가 그리 좋은지 여기저기 빠진 이빨 사이로 어린아이마냥 얼굴 한가득 홍소를 띄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가져온 모래를  할머니가 벗어  고무신에 가득 채우더니 손으로 잔모래를 걷어내고 말끔히 토닥거렸다. 진하게 노을이 깔려 사람들 그림자로 정신없이 얼룩진 해변인데, 아이처럼 실거리는 여든의 노부부만이 눈에 찼다. 바람에 춥지 않을까 우산으로 감싸고 혹시나 시리지 않을까 고무신 가득 모래를 얹는. 그리고, 그 모습에 미소 짓던 여든의 그 모습만이 들어왔다. 왠지 모를 뭉클함이 사람을 대함에 살갑지 않던 내게 작은 일침을 주는 것처럼 한참 동안 그 모습을 그냥 바라봤다.


비밥.

그때부터일까. 우산을 좋아하게 된 게. 




살다 보 시답잖은 기억이지만 또렷하게 오래가는 기억들이 있다. 그럴싸한 멋도 무게 있는 가르침도 없지만, 어느새 기억의 중심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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