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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원 Jan 23. 2024

미움을 토해낼 공간

일상 22, 가족을 싫어하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방법이 필요하다




사는 건 참 과격하다. 나만 그런 것인지, 용서는 도통 쉽지가 않다.


일단 좋은 이야기 먼저. 근래 봤던 면접 중 가장 뿌듯한 마음이 앞섰던 면접이 드디어 내게 승기를 흔들어주었다. 아직 2차 커피챗이 남아있지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새 침잠해 있던 마음들이 두둥실 떠올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커다랗게 부푼다. 그새 나는 두 개의 사업 빌딩 계획에 기획자이자 프로덕트 매니저로 뛰어들게 되었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날 사랑하는 것과 진배없을 정도로 나를 믿고 있다. 이럴 때 굳게 머무는 책임감. 그게 내가 정의하는 책임감이다.


책임감. 나는 이제 아빠의 책임감이 부담스럽고 더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가치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좋은 말만 남겨두고 싶었던 일기장에 단 한 줄도 적고 싶지 않았고 누구나 다 아픔이 있기에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내 상처를 스스로 후비는 말들은 적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전철에서 눈만 감고도 마음속에 몇십 줄이 훌쩍 넘는 울분을 찌끄렸던 시간을 생각하니 이제는 슬슬 뱉을 필요가 있어 보여 주르륵 적는다.


아빠는 참 좋은 사람이다.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다만 내게는 참 모난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가 내게 해주는 말들이 얼마나 값진 말들인지 알고 있고, 그가 나를 위해 내려놓은 것들이 있다는 것쯤, 정말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아빠에게 내 마음을 제대로 토로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건 아빠와 가족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무기로 휘둘러, 자신도 모르게 내게 던져놓은 것들. 무심결에 던진 파편에 내가 맞아 피를 흘리고 엎어져도 모르던 것들로.


나의 부모님은 내가 두 살이 되는 해에 나를 진해로 내려보냈다. 나를 스쳐가는 모든 사람이 이야기한 것을 미루어보아 둘 중 어느 누구도 나를 돌볼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스물일곱의 어린 엄마는 나를 돌볼 만큼 다 크지 않았었고, 서른둘의 아빠는 본인이 하고 싶은지 조차 확신이 없었던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두 사람은 참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것들이 그들을 그렇게 여기게 만들었는지 차마 다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랬다. 돈이 없어 지갑이 빈곤하든, 여유가 없어 마음이 가난하든. 어릴 때부터 기억하는 냄새 중 하나는 매캐한 담배 냄새고, 다른 하나는 지린내가 날 정도로 독한 술 냄새다.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외조부모님과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 부모가 아무리 숨겨도 아이는 다 알고 기억한다고. 그들은 숨길 노력도 못 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으니 나는 알고 싶지 않아도 눈치를 채야만 했다. 


그러다 여섯 살, 나를 꼭 딸처럼 키우던 외할아버지가 내 눈앞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에 나는 경기도의 친조부모에게 보내졌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마음이 너무 가난하고, 너무 빈곤한 나머지 6년 간 단 한 번도 맞고 자란 적 없었던 내게 그렇게 손찌검을 해댔다.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내가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다시 또 손을 올렸다. 지금이라도 그런 일을 겪는다면 못 견딜 것만 같은데, 어린 내게는 정말 큰 변화였다. 무식한 나머지 상식이랄 게 없는 사람들이었어서, 나는 늘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침착하게 묻곤 했다. 아빠, 나를 언제쯤 데리러 올 거야? 그러면 아빠는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끔 전화를 받을 때면 바쁘다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이왕 이런 김에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싶어 졌었고, 집에서 떠나고 싶어질 때면 늦게까지 친구 집에서 놀다 들어오곤 했다. 


난 머리가 너무 좋았다. 자랑이 아니라, 정말로 똑똑했다. 하루에도 책을 네다섯 권씩 읽었고, 책 한 권을 끝내면 더 어려운 책으로 옮겨갔다. 반절은 이해를 못 해도 철학이나 사회,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불려 가는 것을 뿌듯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결핍을 채우는 행위였던 듯하다. 가끔은 책을 통째로 외워 할머니나 주말에 오는 아빠에게 그 책의 줄거리를 설명해 주고 내가 생각한 것을 공유해 주는 것을 즐거워했던 것 같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것을 찾아다녔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강했고,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을 경험해 보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총명한 나머지 너무 예민해서 생각이 과했고 어른들이 하는 말이어도 내 윤리에 맞지 않거나 내가 생각하기에 부조리하면 거부하고 벗어나려는 성향이 강했다. 인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말대답을 할 때 레퍼런스를 이용해 말대답 속의 논리를 찾곤 했다.


이런 나를 키우기 참 버거웠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앞서 말했듯 무식했고, 할아버지는 주변인의 평가로 미루어보아 정말로 나쁜 사람이지만 리더십이 있어 아무도 반기를 들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아빠는 나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키우고 싶어 하지만 일단은 방목하고 보는 이상한 괴짜였다. 덕분에 나는 이들 사이에서 자유를 얻은 듯하다가도 아닌 것 같은 아리송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잦았다. 신데렐라를 읽으며 언젠가는 나도 그녀처럼 새로운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참 자주 했던 것 같다. 돈이 없어 정부에서 보내주는 탈지분유를 물에 타서 우유 대신 마시다가, 친구들과 놀고 싶어 500원만 받을라 쳐도 실컷 혼이 나고 종아리가 부서져라 맞았다. 너는 엄마아빠가 없으니 네가 알아서 잘 커야 한다는 말을 할머니에게서 수백수천 번은 들은 것 같다. 엄마를 닮아 생각이 없다는 소리조차도.


5학년. 11평짜리 임대주택 아파트, 한 사람이 누우면 끝나는 방 두 개가 복잡스럽게 붙어있는 그 조그마한 아파트. 겨우 내 방을 얻었을 때, 고모가 일본에서 냅다 5살짜리 사촌동생을 데리고 도망쳐 나와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삶이 점점 더 꼬여 들어갔다. 작은 케이지 안에 햄스터 여러 마리를 넣어 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그야말로 폭력이 난무하는 집이었다. 일찍이 떠난 내 어린 강아지 코코는 영민한 나머지 우리를 지키려고 목청을 높여 짖다가 구두굽으로 머리를 타격당하는 일이 많았다. 어른들은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다 "그럴만하다"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분개하며 대체 어떤 폭력에 "그럴만한 게 있냐"라고 물었다가 똑같이 얻어맞았다. 고모는 소리를 지르며 내 어린 사촌동생을 미친 듯이 두들겨 패곤 했고, 할아버지는 똑같이 나를 그렇게 때렸다. 꼭 샌드백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또 물었다. 언제쯤 나를 데리러 올 거야? 나는 아빠랑 단 둘이 아주 좁은 방에 있어도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그렇게 말했더니, 아빠는 말없이 "참아. 네가 그러고 싶다고 해서 전부 다 되는 줄 안다면 네 착각이야."라고 말했다. 아마 아빠는 이 말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모를 거다. 나는 아주 늦은 밤에 부엌으로 나가 식칼을 움켜쥐고 오랫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누워있는 안방을 바라본 적이 있다. 누구든 나오면 찔러버리고 영영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건 우리 엄마였다. 처음 어린이날에 나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주겠다고 약속했던 엄마는 오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나를 잘 보러 오지 않았다. 늘 무언가 큰일이 있어 내게 오지 못 하는 일이 많았고, 조금 틈이 나서 나를 보러 오는 날이면 어딘가 텅 빈 눈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엄마를 너무 사랑했다. 엄마의 마음에 많은 흉이 져있고 그 아픔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엄마의 전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만큼 너무 소중한 시간들이라 엄마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친가에 보내지 않았으면 했다. 가끔 엄마의 집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놀러 가면, 술에 찌들어 변기에 구토를 하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혼자서 슬그머니 말했다. 나는 엄마를 지켜줄 수 있는데, 엄마가 마음 아프지 않게 같이 있어줄 수 있는데. 얼굴을 볼 때마다 엄마의 손목과 팔에는 날카로운 것들로 깊은 상처를 내고 꿰맨 흉터들이 늘어났다. 잔뜩 취해 담배냄새를 풍기며 지쳐 잠들어있는 엄마의 옆에 꼭 붙어 밤새도록 토토로나 반딧불의 묘, 미녀와 야수를 돌려보았다. 나는 토토로가 메이와 사츠키를 시치고쿠산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옥수수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줬듯이, 언젠가 내가 엄마에게 옥수수를 혼자 가져다줄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사준 토토로 인형을 정말로 집에 가져가고 싶었지만, 밤마다 어둠을 보며 우는 엄마가 안쓰러워 인형을 곁에 내어주고 왔었다. 토토로가 엄마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둠이 너무 싫다. 계속 어둡고 어둡기만 하면 그 어둠이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것만 같아서 무섭다. 엄마가 처음으로 내게 사준 분홍색 토끼 인형 토미와 아이보리색 토끼 인형 토순이를 할머니한테 빼앗겼던 때도 어두운 밤이었다. 몸이 열에 약해 더운 여름에 숨을 쉬지 못해 울면서 깨어나자마자 목침으로 얼굴을 구타당한 때도 어두운 밤이었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도, 아빠가 나를 두고 서울로 돌아가버렸을 때도, 전부 다. 나는 내 것이 없었다. 내 것이라고 부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내 사촌동생이 내 친동생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뒤로 나와 똑같은 꼴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난 가족들에게서 받지 못 한 사랑을 그 애에게 쏟아부었다. 그 애에겐 토미와 토순이 같은 인형들이 남아있었지만 그 애를 비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받지 못 한 보호를 내가 해주고 싶었다. 가족들은 가끔 나를 의아해한다. 왜 네 동생을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단순한 자매 간의 사랑이라 생각한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중학생이 되어 아빠의 사업 성공으로 서울로 올라오고 커다란 집에 이사 오게 된 후, 나는 그 집에서 가장 큰 방을 선물 받았다. 책을 꽂아둘 수 있는 튼튼한 책장이 생겼고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예쁜 민트색의 책상이 생겼다. 푹신한 퀸 사이즈의 침대와 좋은 향기가 나는 뽀송한 이불을 얻었다. 내 옷을 차곡차곡 개어놓을 수 있는 옷장도 있었고, 내가 혼자서 쓸 수 있는 욕실도 있었다. 그 당시 가장 그래픽이 좋았던 게임이 돌아가던 최고 사양의 컴퓨터도 얻었고, 좋은 스피커도 선물 받았다. 교복도 제일 비싼 브랜드에서, 신발도 제일 비싼 브랜드에서, 가방도, 공책도, 볼펜도, 연필과 샤프도, 전부 다 비쌌다. 핸드폰은 새 기종 중 가장 좋은 기종으로, 매번 바꿔 달라 말할 때마다 바뀌었고, 용돈도 받고 싶은 대로 받았다. 엄마가 사는 동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동네로 돌아갔었기 때문에 엄마도 보고 싶은 대로 실컷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맘때즈음, 나는 그 넓은 집이 어두워질 때마다 부엌에 걸어가 커다란 칼을 쥐고 창 밖을 쳐다보는 괴상한 버릇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버릇처럼 했던 것 같다. 강철도 씹어먹고 추운 겨울에도 티셔츠 한 장 입고 다니던 내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던 시기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할머니는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아빠는 나와 고작 열 몇살 차이가 나는 여자를 집에 데려왔다. 고모는 점점 히스테릭해져 가고, 할아버지는 내 동생에게까지 손찌검을 했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느 날, 친구가 학교 이벤트로 코스프레를 하자는 제안을 해 신나게 계획을 짜고 동대문까지 가 긴 금발의 가발을 하나 샀다.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제법 유행이었고, 학교 이벤트에서 그런 걸 해본다는 건 새로운 걸 좋아하는 내게 정말 재밌는 일이었다. 신나게 가발을 구매하고 들어와 이벤트 때 사용하기 위해 손질을 하고 있는데 방에 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를 물끄러미 보며 환멸에 가까운 눈을 하던 할머니는 내 목을 조르며 정신이 나갔냐고 소리를 질렀다. 깊은 속에서 무언가가 끊겨나가는 느낌을 받고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정말로 할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어버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고모는 달려와 내게 네가 뭔데 우리 엄마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냐며 화를 냈고, 아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할머니는 그 이후로 내가 죽여버린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꼭 무슨 경험담 이야기 하듯 사람들에게 말하며 내 험담용으로 사용했고, 고모와 아빠는 기억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기억나는 것들이 수십 개가 있다. 폭력, 비난,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들...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후에 이어졌던 어린 연애들은 전부 나쁜 기억들 뿐이다. 애정결핍에 시달려 앞뒤 분간도 못 하고 상처만 남았던 기억들. 아무도 무엇도 말려주지 못하고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괴롭게 했다. 결국 끝은 모두 외면이었다. 아빠는 내게 돈이 마르지 않도록 해주겠다 약속했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바랐던 건, 늦은 밤 함께 아파트 숲길을 걸으며 따뜻한 코코아를 나누어 마시고 알아듣기 어렵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해 듣던 시간들이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한다고 대답이 돌아오고,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면 보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그런 간단한 것들이었다. 어렵지만 그렇게 쉬운 것들이었다.


성인이 된 내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는 다시 돌아보지 않아도 선연하다. 내 뺨을 스친 칼날, 내 머리를 때리던 철제 색연필 케이스, 부서진 핸드폰, 추운 겨울,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이 눈이 멀게 쏟아지던 날, 소름 끼치는 비밀번호 소리, 핸드폰 벨소리... 내 몸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자극이 싫다. 온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그 감각이 환멸스럽다. 진정한 사랑을 알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지금도 내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나마 나 자신의 아픔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제 울증이 심해지면 집에 있기만 해도 한숨이 터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집을 집이라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얼마나 불행한가. 돌아갈 곳이 존재하지만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는 것은 정말로 지루한 모순이다. 지붕이 있다고 해서 모두 집이라 불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합리적이지 못 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면 내가 조금이나마 덜 우울했을지, 나를 덜 불행하다 여기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일요일. 11월 말부터 정말 자주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걱정스러운 것이 하나 없는데, 그들은 아니라는 것쯤 파악하는 것은 쉬웠다. 깊어진 울증으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피할 수 없는 얼굴들을 매일같이 봐야 하는 건 정말 지옥 같았거든. 아빠가 말했다. 아무리 할머니가 싫어도 내게는 사랑하는 엄마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집 밖을 나가있냐며, 과하다,.... 나는 기가 차서 말을 하지 못했다. 정말 많은 말들이 속에 들어찼다. 그러나 뱉고 싶은 말이 수두룩하고 빽빽하게 내 마음에 들어차 있는데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과거에 시달리는 나를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은 늘 그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는 나를 비난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기면 도망치는 게 당연한 건데, 적어도 그걸 긁어 진물을 내서는 안 되는 일인데도 이해를 못 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그들은 내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기까지 한다. 우리 모두가 얼마나 힘내고 있는지 너는 모른다고.


사과조차 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마음 깊이 용서하기에는 나는 성녀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저 넘어가고, 덮고,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그냥 내가 도망쳤을 때에는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전부다. 내가 무슨 말을 이렇게 길게 지껄여놨는지 다시 돌아볼 힘도 없지만... 오늘은 고양이들이나 안고 푹 자고 일어나 커피챗에나 잘 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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