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앤모닝 Nov 20. 2023

나의 작은 그녀에게

“또 보자.”

그녀가 갓 마흔이 되던 때 철없고 인생 경험 없던 나에게 그녀는 그저 어른이었다. 멋도 모른 채 들어가 앉아 있는 대학원 교실 안에서 그녀는 작은 몸으로 내 옆에 앉아서 나도 몰라 괜찮아 그러면서 해나가면 돼 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어디에서든지 항상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150 센티미터가 겨우 넘는 자그마한 몸을 가진 그녀는 모든 게 다 작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녀의 바쁠 때 걸음은 마치 식량을 구해 돌아다니는 자그마한 곤충의 그것과 비슷했다.


“어디 가세요?”

그녀가 가야 할 곳은 대부분 집이었지만, 그녀가 매일마다 치러내야 할 일은 한 사람이 하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양의 일이었다. 경험 없는 내가 보기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만큼.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세 아이와 남편의 밥을 하고 각자의 목적지로 출근 준비와 등교 준비를 시킨 후에 대학원에 나와 오전 수업을 들었다. 그녀는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집에서 점심식사 하기 원하는 남편의 밥을 차려내야 했는데, 아침을 대충 거르고 교내식당에서 가볍게 식판에 덜어 먹는 밥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나의 눈에 그녀의 일련의 아침 루틴은 복잡한 기계를 들여다보듯 어렵게만 느껴졌다. 점심을 마치면 아침부터 밀려 놓은 설거지, 집안 청소를 하고 도미노처럼 하교하는 아이들을 거둔 다음, 다시 저녁 준비를 한다. 한창 클 나이의 아이들은 오늘 엄마가 뭐 만드나 주방을 기웃기웃하니 대충 먹자는 말이 안 나올 게 뻔했다. 조물조물한 입들은 원하는 것도 제각기 달라서 나는 이거 해 줘, 나는 저거 해 줘 했다.


당장 내일 수업 발표를 해야 하는 데, 준비가 안된 수업 발표는 그녀를 더욱 조바심 나게 했더랬다. 너그러운 지방대 교수님들과 수업에 참여하는 고만고만 비슷한 처지의 동지들이 전해주는 동감 어린 말들조차 크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기대치로 그 만큼은 해내고 싶어서 저녁마다 책상에 앉았다. 읽어야 하는데, 깔끔하게 보기 좋게 정리해서 써내야 하는데, 한 쌍의 눈꺼풀은 중력의 힘도, 억척 같은 그녀의 의지도 이겨내지 못하고 밑으로 꺼지기만 했다. 성실하고 돈 잘 버는 남편 두고 왜 이렇게 사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그러게 말이야 겉으로 말하고, 속으로는 이래야 내가 사는 것 같다 혼자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채찍질하며 살아냈다.


“4기라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4기라는 말은 어색하고 비현실적이었다. 현실에서 그녀와 나는 장치, 열기, 가자미가 두 조각씩 곱게 썰려 물렁하게 푹 익혀진 무, 감자가 솜씨 좋게 어우러진, 현지 사람이 들끓는 내공 있는 식당에서, 생선찜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밥이 너무 잘 됐네 밥도 먹어 봐 하면서 그 말을 했다.


암이라는 소식을 들은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그녀가 항암을 진행 중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출국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 마디 할 그녀도 아니지만 몇 개월 동안 부채의식은 쌓이고 쌓여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 즈음 만나게 된 그녀는 나를 앞에 두고 조근조근 비현실적인 말을 전했다. 암 선고를 받기 몇 개월 전에 파킨슨병 진단을 이미 받은 터라 충격은 덜 했다고 그냥 무덤덤했다고 어디선가 봤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현 상황을 보고했다. 항암 과정이 고달파서 식이요법으로 전환해볼 까 고려하다는 말과 이 반찬도 한 번 먹어 봐야지 하는 말을 섞어서 했다.


삼십 대 중반에 결혼해 삼십 대 후반에 첫 아이를 임신했던 나는 남산만 한 배로 여기저기 수업을 하고 또 들으러 다니고 있었다. 출산 휴가는 엄두도 못 내는 시간 강사 자리로 전전긍긍하면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출산하면 몇 달을 쉬어야 하나 걱정하던 때였다. 그녀가 집으로 나를 불러 밥이나 먹자 했다. 그녀는 그 날이 내 생일인지 몰랐을 테지만 그저 내 마음 속으로만 오늘이 내 생일인데 하면서 그녀 집으로 갔더랬다.


갓 지은 밥에 된장찌개, 생선구이, 밑 반찬, 뜨끈하고 달큰하게 데쳐진 양배추 찜이랑 조그만 튀김 냄비에서 갓 튀겨낸 야채튀김까지. 뜨끈할 때 먹어야 제 맛이라며 그것들을 온도 맞춰 식탁으로 내느라 그녀는 앉지 못하고, 이삼 미터 가량의 주방을 예의 그 잘은 걸음으로 종종거리며 김 솔솔 나는 음식을 차례 차례 내 앞에 내주었다. 이 집 딸 되고 싶다. 이렇게 먹으면 살이 안 찔 수가 없겠네 너스레를 떨며 쉴 새 없이 나오는 침이랑 섞어 씹어가며 그 따뜻한 밥을 꿀떡꿀떡 받아먹었다. 지금은 청소년기가 들락말락한 아들의 몸 속 어딘가엔 그녀가 그 때 해 준 밥으로 만들어진 세포가 제 기능을 하는 일원이 되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세포 덕분인지 그 아이는 부모 밥을 달고 감사하게 받아 먹고 엄마 밥이 최고라고 말하는 아이로 자라주고 있다. 그녀에게는 나보다도 가까운 비슷한 연령의 대학원 동지들이 몇 더 있었는데, 나에게 가장 가까운 대학원 동지를 꼽으라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오직 나 만을 위한 그날의 온기 가득한 밥 때문이다.


“건물이 너무 좋은데요.”

“뒤에 건물 하나 더 있어.”

수완 좋은 그녀의 남편은 여기저기서 사업을 했는데 최근에는 살고 있는 도시의 대학 근처에 그 근방에서 제일 큰 원룸 빌딩을 두 채나 지어서 노후에 돈 걱정 하나 없이 그저 돈만 쓰며 살다 늙다 할 수 있게 자수성가했다. 건물 앞에 그녀를 내려주자 깃털같이 가벼워진 그녀가 그랬다. 또 보자고. 출국하기 전에 시간되면 다른 선생님들과도 한 번 또 보자고. 네네 또 뵈요 쌤 하고 인사했다.


누구든지 헤어질 때 그렇게 말한다. 또 보자고. 또 볼지 안 볼지 몰라도 그런다. 또 보자고. 돌아오는 길에 또 보자는 말이 명치에 걸려서 내려가질 않는다. 또 하루 저물어간다. 머물러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또 보자는 말과 노랫가사가 명치에 걸려 막혀 맴돈다. 오늘 장치는 아무래도 소화제 없이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머물러 있는 사랑,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들 산다. 그래야 산다.

빨리 나아서 미국 한번 오셔야죠. 완쾌하실 거라 믿고 있을게요. 또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를 떤다.

나도 누군가의 온기 가득한 밥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