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세금을 납부해왔다. 우리도 조(租), 용(庸), 조(調) 형태부터 지금의 제도까지 다양한 형태로 세금을 내왔다. 현재는 헌법에서까지(제38조) 납세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 하는 건 당연히 알지만, 매월 월급명세서에서 적지 않은 액수가 빠져나간 걸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조세 부과 및 납부가 체계화되지 않은 과거에는 납세자와 세리(稅吏)간에 분쟁이 상당해서 세리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을 것 같다.
지난 주말 벨기에 안트베르펜 미술관에 갔을 때 세리를 묘사한 그림을 봤다. 이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는 Marinus van Reymerswaele라는 화가의 작품이다. 비슷한 그림을 전에 다른 미술관에서도 본 거 같아 나중에 찾아보니 같은 사람 작품이다. 이분이 동일한 주제로 여러 작품을 그리셨다.
(좌) <The City Tax Collector> 안트베르펜 미술관, (우) <Two Tax Gatherers> 런던 내셔널 갤러리 다운로드.
두 작품 컨셉이 비슷하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장부에 뭔가를 적고 있다. 아마 마을 사람들의 세금 납부 현황일 것이다. 뒤에 있는 사람은 좀 야비한 표정으로 관람자를(또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납세자를) 바라보고 있다. 테이블 위엔 세금으로 받은 동전이 가득 쌓여 있다. 두 사람 뒷편에는 세금 장부로 보이는 서류들이 쌓여 있다.
두 작품 모두 화가가(또는 납세자들이) 세리들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장부에 적고 있는 사람은 납세자의 어려운 상황은 전혀 신경도 안쓴다는 듯한 냉혈한의 표정이다. 오른쪽 사람은 더 나아가 냉정함을 넘어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다. 당시엔 세리들이 징수하는 액수의 일정 비율을 급여로 받았다고 하니 납세자들을 최대한 독촉하고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어쩌면 반감의 일환으로 화가가 살던 동네의 세리들 얼굴을 초상화처럼 그렸을 수도 있다. 후대에 길이길이 남으라고.
<The Banker (또는 The Money Changer ) and his Wife>. 프라도 미술관 다운로드.
프라도 미술관에도 같은 화가의 비슷한 작품이 있다. 여기는 제목이 <은행가(또는 환전상)와 그 부인>이다. 이 작품은 처음엔 고리대금업자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나중에는 상인과 상업행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내용으로 재평가 받았다고 한다. 제목을 그대로 해석하면 은행원 남편이 테이블 바닥에 놓여 있는 여러 동전들을 환전하고 있고 이 모습을 부인이 바라보는 장면이다. 은행원에겐 반감이 없는지 세리들처럼 악독하게 그리지는 않았다.
Marinus van Reymerswaele의 여러 작품에 돈(세금, 환전)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이 그려진 16세기 초반은 안트베르펜이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 시기에 희망봉을 비롯한 무역로가 개발되고 곧바로 신대륙도 발견되면서 무역 규모가 대폭 확대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국제무역항인 안트베르펜에는 여러 나라 상인들이 몰렸을 것이고, 환전이 은행의 주요 업무였을 것이다(양정무,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6).
이 작품들이 그려진 시기는 16세기 초반이다. 종교개혁 움직임이 막 시작되긴 했어도 아직 기독교가 생활 전반을 규율하던 시기였다. 즉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부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부유층들은 이런 그림들을 걸어놓음으로써 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고 자본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고자 하지 않았을까.
Quentin Massys <The Banker and his Wife, 1514>. 브뤼셀 왕립미술관.
역시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했던 Quentin Matsys라는 화가도 <은행가와 그 부인>이란 작품을 남겼다. 앞에 언급한 작품들과 주제나 인물의 구도 등이 매우 흡사하다. 두 사람 모두 활동 무대가 안트베르펜이었고 Quentin Matsys의 연배가 20여 년 앞서는 걸로 미루어 볼 때, 그가 Marinus van Reymerswaele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남자는 저울을 들고 동전의 무게를 재는 중이다. 테이블 위에 다양한 동전들이 많은 걸로 보아 여러나라의 동전일 것이다. 안트베르펜이 당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으니 환전상은 흔한 직업이었을 것이다. 부인은 성경책을 펼치고 있지만 눈길은 돈으로 가 있다. 성경책 읽는 것보다는 돈 세는 게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뒤에 있는 선반에는 비싸 보이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은행가가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열해 놓은 것 같다. 돈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대부분의 식자층은 겉으로는 성경말씀 대신에 돈이나 세고 있는 이 작품들을 천박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속으로는 손에 냄새가 배도록 돈을 만지고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체면상 세리는 좀 그렇지만 은행가(또는 환전상)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듯.
젊은 시절, 월급을 훨씬 많이 주는 직장을 그만두고 소위 '사명감'을 택한 적이 있다. 이제 와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