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은, 그리고 잊을 사람들 #6.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
(C의 이야기는 전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C에게 집착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메시지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일희일비하는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연락 텀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변했다는 것은 곧 변심의 시그널. 이미 그의 마음은 빙하보다 차갑게 식었음을 감추지 못해 나타나는 징조다. 물론 당연히 그 사람에게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불안형 애착유형을 가진 내게 연락이란 그저 상대의 마음을 체크하는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다른 식으로 해석하기란 어려웠다. 머리론 이해해도 마음이 '다른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딱히 그를 죽을 정도로 사랑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이 관계가 끝나면 또다시 상처와 허무함이 찾아온다. 반면, 감정과 관계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가 도래했을 때 내가 받을 상처. 그 아픔의 정도를 알기에 대비 없이 찾아오는 이별에 항상 경계해야만 했다. 그 두 인지가 충돌해 끝없는 불안과 고통, 그리고 C를 향한 집착을 만들었다.
나는 C가 열렬히 구애하는 모습에 반했을 뿐이다. 그게 사라진 이상 내 마음도 그에게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내 마음도 집착과 동시에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안형 애착을 가진 사람의 심리는 일반적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 언제나 비약적이고, 항상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해석하고 정의하려 들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봤자 큰 공감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공감을 받기 위해 그의 행동을 확대해석해서 퍼트리기도 하고, 특정한 잘못 하나에 포인트를 맞춰 그가 엄청 못된 사람이며, 지금 내게 하고 있는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일임을 소문낸다.
C와 내 사이에도 결국 그런 고름 같은 갈등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 4시간 동안 일만 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것도 사무직이."
"너, 사무직 해 봤냐?"
그래. 해 봤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자료를 검색하고, 전화로 여기저기 취재를 하며, 글 공장처럼 매일같이 글을 찍어내며, 컨펌받고, 문장이나 단어 단위로 지적을 받으며 스트레스받았던 세월이 당시의 내게도 있었다. 알고 있다. PC카톡이 되는 환경이라면, 글 세 문단 쓰고 한 번 정도 카톡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와 실시간으로 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오늘 점심은 맛있었냐고 묻는 말에 3시쯤에라도 어땠는지 대답해 줄 수는 있었잖아.
정말 간단한 질의응답일 뿐인데, 말할수록 내용은 산으로 간다. 그는 '4시간 동안 연락이 없어서 화를 낸다'는 표면만 핥을 줄 알았다. 그 말이 곧 '너 원래 안 그랬는데, 이제 나한테 연락하는 게 귀찮을 정도로 마음이 식었구나'의 간접적 표현임을 깨닫지 못했고, 사람이 일하다 보면 4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되는 게 당연하다는 내용으로 옥신각신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4시간이고 5시간이고 6시간이고 중요하지 않았다니까. 만약 네가 8시간에 한 번 연락하는 사람이었고, 그 내용도 충실하며, 충분한 사유가 있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너그러웠을 거야. 우리는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지, 상대방을 족쇄처럼 옭아매고자 하는 유형이 아니거든.
무엇보다 그는 내가 학생이라는 표면적 사실에만 집중했다. 그는 내가 학교를 장기간 휴학하고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 본인 입으로 "대학생들은 아무래도 직장생활에 공감하기 어려운 애들이 많은데, 너는 이런 이야기도 다 공감할 줄 아니까 좋은 것 같아."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그는 결국 나를 공격하거나 방패로 삼기 위해 현재의 내 신분을 이용했다. 분했다. 그런 행동이 결국,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처럼 느껴져서.
"집착이 너무 심해서 힘들어. 어떻게 사회생활 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연락을 바라."
"그렇다고 맨날 만나자고 보채는 것도 아니고, 다른 걸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뭐 하러 가기 전에 말해주고, 누구 만난다고 할 때 그것만 알려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던 문제야? 반대로 내가 이거 바라는 동안 나는 뭘 그렇게 못했니. 나한테 바라는 거나 요구하는 게 없었던 이유는, C가 내게 기대하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최대한 C가 안정적일 수 있도록 노력했기 때문 아닐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자기중심적이란 거야."
"논점 흐리지 말고 물어본 말이나 대답해. 반대로 내가 C를 서운하게 했거나 불안하게 한 적 있어? 아니면 많았는데 그냥 말을 안 했던 것뿐이야?"
".... 없어."
"그런데 왜... 왜 나는 C가 힘들까. 누구 잘못이야? C가 내게 그런 행동을 하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그런 건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 내가 잘못한 거라면 그런 거겠지."
그날의 문제는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이렇게 어영부영 갔다. 내 말에 담긴 '나는 이상하지 않고, 네가 나를 자꾸 불안하게 만들잖아'라는 의미를. 지금의 C는 이해할까.
항간에는 집착이 더 큰 화를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불안형 애착유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집착이란 그저 자신의 불안감을 표출하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 애초에 이유 없이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내게 안정감과 확신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그들이 내 상처를 조금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수도 있다. 지금 나는 이런 부분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고, 나를 제대로 마주하고, 이런 단점까지 포용해 주길 바라는 약간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마음. 반대로 표현하자면, 이런 부분 때문에 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상처를 안고 있으니, 이것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관계는 아주 안정적일 거라고 보내는 시그널. 하지만 불안형 애착유형을 가진 사람이 그대로 쭉 불안형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를 완벽하게 해소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안정형 애착유형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게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건 낭설이라고 본다. 애초에 내가 만난 안정형 애착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혼자만' 안정감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건 회피형 인간의 다른 뜻이라고 하는데, 겪어본 사람들만 아는 그 결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관계에서 본인이 얼마나 안정성을 느끼느냐의 지수이지,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어둠까지 들여다보는 게 능숙한 건 아니었다. 불안형에게 중요한 것은, 혼자 안정감을 가지는 것이 아닌, 내 아픔을 들여봐 주고, 이해해 주길 바라는 태도다. 포커스가 '우리'가 아닌 '나'에게 맞춰져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사이가 서서히 내리막길의 종착지를 향해 달려갈 무렵. C는 내게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을까. 내가 너였다면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났을 텐데."
"나 아나운서 준비하잖아. 나 스스로가 못생겼거나 별로라고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그런 일 준비하지도 않았어. 학원에도 그런 애들밖에 없어. 적어도 내 미모가 남들에게 이상하게 비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준비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면 주변에서 이미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서 어깨에 뽕이 찼거나. 나도 딱히 다르지 않아. 나도 그랬어."
"근데 왜, 스스로가 사랑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가족들하고 사이도 좋잖아. 아니, 오히려 내 주변에서 가족이 가장 화목한 집인 것 같은데. 가끔 너에 대해 잘 모를 때가 있어."
또 그런 오해를 받는다.
불안형 애착유형이 결국 유년시절 가정환경에서 형성되지 못한 애착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C가 말했듯, 우리 집은 남들보다 조금 더 가난했던 걸 제외하면 너무나 화목했다. 가난한 만큼 더 화목했기에 그런 빈곤 속에서 누구 하나 어긋나는 일 없이 지금까지 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맞아.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그래. 근데 그게, 가족들한테 못 받았던 사랑은 아니야. 그러니까. C 같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지속적으로 많았거든? 그 이유야. 다 똑같았어. 그러니까, 그 원인이 가족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나를 스쳐 지나간 나쁜 놈들 때문에 우리 부모님의 사랑까지 욕된 기분이 들거든."
"응. 근데 그건 다른 사람들이잖아. 내가 아니잖아. 그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나한테까지 이상한 공격을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존재만 다를 뿐이지, 내겐 똑같아. 딱히 다르지 않아."
애초에 내 마음도 이미 서늘하게 식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 따위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렇게 대답했다. 사실이기도 했고. 처음부터 이 대화 자체가 '너 이상한 애야'를 말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냥 거기에 맞춰 대응했다. 나는 C처럼 속뜻까지 파악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기싸움 자체가. 이미 이 사이는 이미 끝을 한참 지나쳐 왔고, 누군가가 그걸 말해주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C와 나는 어설픈 미련 같은 게 남아 결국 그 대화가 있고 며칠을 더 냉랭한 온기 속에 보내야만 했다.
생각해 보면 원래부터 불안형인 사람이 없는 게 맞다. 분명 무언가의 트라우마가 겹겹이 쌓여, 견고한 자기 방어의 벽을 만들어 내고, 신경과 교감세포가 마치 사냥할 때처럼 예민하고 민감해지게 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내게도. 분명 그렇게 되기 시작한 부저가 있을 것이다. C의 말대로, 내 유년시절 가정환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학교에서도 교우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 왕따를 당한 적도, 크게 망신을 당한 적도 없던 무난한 삶 덕분에 구김살과 낯가림이 없는 성격이 형성됐다. 그러면. 관계에 한해서 이런 끝없는 가시덩굴을 만들게 된 이유가 뭘까. 그 어딘가에 숨어있을 그 이유를 찾아 떠나 보기로 했다.
- to be continued...
[나를 잊은, 그리고 나를 잊을 사람들 시리즈]
만남, 사랑, 질투, 욕정... 어떤 관계든 반드시 근간이 되는 감정은 존재합니다. 이를 잘 들여다볼 줄 안다면, 인간관계는 그 어떤 책 보다 좋은 성장촉진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내가 떠나보낸 가족, 친구, 동창, 연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내 인생에 있어 어떤 자양분이 되었는지 정리하는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제 경험을 통해 독자 여러분도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 본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