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바라기 Feb 19. 2024

돌아라, 쌩쌩

"딸깍, 딸깍, 딱..."

늦가을부터 심상찮던 안방욕실 환풍기가 결국 고장이 난 게 벌써 두 달 전이다. 생각해 보니 재작년 3월에 전동댐퍼 일체형 환풍기로 교체하고선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다. 의자에 올라 뚜껑을 열고 청소할 일이 귀찮아 차일피일 미루다 이렇게 되었다. 

이젠 더 미룰 수도 없어  청소를 시작했다. 작은 사다리를 놓고 환풍기 뚜껑을 열었는데,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먼지가 잔뜩 끼어 여태 돌아간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 먼지를 다 마시고 있었구나,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페이스 실드까지 착용한 채로 열심히 먼지를 제거했다. 가는 솔이며, 면봉, 물티슈까지 온갖 도구들이 동원되었다. 30분 이상 힘을 썼더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청소를 마치고 조심조심 사다리에서 내려와 살짝 긴장한 채로 환풍기 스위치를 켰다. "윙~", 다행히 환풍기는 다시 잘 돌아갔다. 아무래도 묵은 먼지가 환풍기의 움직임을 방해했나 싶었다. 앞으로는 부지런히 청소하리라 마음먹었다. 


이틀 뒤 저녁, 샤워를 마치고 나온 딸이 한마디 한다. "엄마, 환풍기 또 고장인데?" 이런! 교체한 지 3년도 되지 않아 말썽이라니 슬슬 화가 났다. 댐퍼 일체형인지라 댐퍼와 환풍기를 통째로 바꿔야 하니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셀프인테리어 카페에 들어가 봤다. 인테리어에 관한 이런저런 내용들이 다 올라오는 카페인지라 환풍기 얘기도 있나 싶어서였다. 다행히 손쉽게 관련 정보를 찾았다. 우리 집에 설치한 환풍기 모델 중 특정시기에 제조한 제품에 결함이 있어 무상 as가 가능하다는 후기였다. 그럼 그렇지, 찾아보길 잘했다 싶었다. 


as를 신청하긴 했는데, 예약이 밀려있는지 10일 후에나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조금 불편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두 곳 욕실을 동시에 써야 할 때는 사용 후 선풍기를 돌려 건조해야 하는 수고가 따랐다. 환풍기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다면 좀 과장이려나? 그래도 뭐, 이제 이틀 남았으니 괜찮다. 

"엄마, 환풍기 고쳤는데요?" 오랜만에 집에 와 샤워를 하고 나온 둘째의 말이다. "뭣이라?" 나도 몰래 탄식이 나왔다. 아들, 그걸 왜 고쳤니? 낼모레가 as날인데, 지금 고치면 어쩐담? 맘속으로 외친 말이지만, 아마 표정으로도 다 나타났으리라. 고치고도 잔소리를 듣는다며 억울한 표정의 둘째다. 

다시 멈출 수도 있으리라 기대를 하며 하루를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쌩쌩 돌아가는 환풍기다. 어쩔 수 없이 as를 취소했다. 그러고도 일주일을 환풍기는 잘 돌았다. 


성탄절 오후, 모처럼 남편이 예쁜 말을 한다. "여보, 환풍기가 또 안 도네?" 잘했어, 남편. 무상 as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했나 보다. 고장을 알리는 남편의 말이 그토록 반갑다니. 다시 as를 신청하고,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환풍기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 못 하게 했다. 혹시 다시 작동할까 싶어 고장 난 상태를 영상으로 기록까지 해두고 말이다.

그러다 드디어 오늘이 되었다. 일정이 빽빽한지 아침 여덟 시 반부터 as기사가 왔다. "회로에 문제가 있어서 무상교체해 드릴게요." 반가운 말을 하고선 뚝딱뚝딱 교체를 마쳤다. 준비한 간식과 함께 기사를 배웅한 후, 환풍기 스위치를 켰다 껐다 무한반복해 봤다. 환풍기는 잘 돌고, 내 마음은 홀가분하다. 해를 넘기고서야 수리가 완료되었지만 묵은 짐을 털어낸 듯 참 좋다. 뭐든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관리해야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좌충우돌 환풍기 수리기는 끝이 났다. 


2024년 갑진년 새해다. 쌩쌩 도는 환풍기처럼, 비상하는 푸른 용처럼 올해도 열심히 달려보리라.


- 서랍에 넣어두었던 글, 뒤늦게 올려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서 TV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