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 or 번아웃우 or 우울증 or 갱년기
증상은 이렇게 나타났다.
주말 2박 3일... 세탁, 청소 최소한의 꼭 해야 살 수 일만 하고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했다.
2박 3일 그렇게 쉬어도 4년 쓴 겨울 아이폰처럼 3시간이면 방전되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도, 코 앞에 CGV가 있는데도 서울의 봄, 웡카, 파묘 뭐 하나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고는 싶었지만 보기 귀찮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도 스카이스캐너 열어 놓고 아 언제 비교해 그러고 닫았다. 그냥 내 소파에 누워 여행 유투버들을 보면서 만족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6개월을 보냈던 것 같다.
문제라고 생각도 못했고 그냥 프로젝트에 이슈가 한다발이고, 출퇴근이 힘들어 체력이 떨어졌다 생각했다.
이때부터 각종 비타민, 아르기닌, 홍삼, 몬스터를 도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참고로 단기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효과는 몬스터였고, 뭔가 심적으로 뒤틀린 날에는 안정액도 효과가 있었다. 미래의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거라며 말려도 오늘은 못 버티겠으니 혼자 운전하면서 마셨다.
나의 경우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것처럼 순식간에 85~80 쯤의 컨디션에서 제로 라인으로 뚝 떨어졌다.
그렇게 번아웃인지 슬럼프인지, 우울증인지, 갱년기인지 모를 디프레스가 6개월 정도 지속되니 이건 정말 정상이 아니다 싶었다.
방황할 포인트도 여럿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조직에 대한 애정이 커진 만큼 "아 왜 저래" 싶은 게 있었고, "나 혼자 사서 지랄이군" 이런 한계에 씁쓸해졌다. 이직을 하지 않는 내가 나태하다 싶었고, 매일매일의 작은 에피소드들은 싫음을 확신으로 강화하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이유를 찾자면 모든 것이 이유였고, 더 솔직히는 원인이 뭔지도 모르겠는 그 상태였는데...
이 상태를 탈출하기 위한 자극과 변화가 필요했다.
이사를 해볼까 했다. 가족들의 반대와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직종을 바꿔 스마트팜 농부가 돼 볼까 했다. 예상보다 기간과 비용 준비가 많아야 했다.
그러다 그러다 그러다 안 되겠다 싶어 호르몬 검사를 하게 됐고 결과는 호르몬이 수치 저하...너무 떨어져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 상태가 심각하다 느꼈는지 매 상담 때마다 상당한 시간을 들여 진심으로 어드바이스를 해주셨다. 뭔가 무조건 재미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며 그게 핸드폰 게임이라도 좋다고 했다. 호르몬 치료보다는 오랫동안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운동처방이라고 시작해보라고 하셨는데 이게 참 너무 교과서 적이다 싶었다.
내 주변에 운동 신봉론자가 한둘인가? 운동 좋은 거 몰라서 안 했겠냔 말이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들어서 병원 대각선에 보이는 짐에 가서 회원 1년에 PT 22회까지 등록했다. 하면서도 "아...또 내가 유니세프가 되는구나. 알면서 날리는구나" 싶었지만 결제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다.
- 일주일 휴가 내고 생활 속 리프레시
- 약간의 금융치료(정기연봉인상)
- 보고 싶어도 못 만나던 사람도 만나고
- 기도도 해보고
- 명언도 필사해 보고
- 주 7일, 짐에 가서 운동(PT 선생님 없어도)
- 술도 진탕 새벽까지 마셔보고
- 누군가의 제안에 따지지 않고 "YES" 하기
- 공격적이지 않도록 천천히, 더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노력하고
- 일과 생활 구분
- 유튜브 시청 줄이고 음악 듣기
- 포트폴리오 정리하기
시도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본 것 같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운동 최고였다. 충분히 강도를 높이지 않아서 할 만한 것 같지만 운동 예찬론자들이 많은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가장 확실하고 기분 좋아지고 아팠던 곳들이 조금씩 나아지는, 해결되는 뭐 그런 교과서적인 효과가 있었다.
오늘부로 60~70 정도로 회복이 된 상태다.
앞으로도 또 어떤 고비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2024 상반기의 시도들로 운동을 좋아하게 됐으니 그것으로 충분히 큰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