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ngNew Dec 06. 2023

[1] 영어를 잘하는 사람, 영어를 좋아하는 사람

번역 탱커 스탯 기록부

대학을 무탈히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이 되면 '아, 이제 뭐 해 먹고살지?'라는 고민을 으레 하기 마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가 된 거죠. '대학까지 졸업하고 용돈 받고 살 수는 없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보통은 자신이 전공한 부분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든가 아니면 이와 관련 없는 전혀 다른 분야로 가는가의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합니다.


저는 서울 소재 모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영어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대학 전공까지 쭈욱 '영어'라는 한 가지 무기만을 갈고닦았습니다. 그렇다고 몇 년씩 유학을 다녀오거나 어려서부터 외국에 살아 영어를 유창하게 쏼라쏼라하는 그런 건 아니지만, '영어 공부' 자체에 흥미가 워낙 커서 전공까지 그렇게 선택을 한 케이스죠. 그래서 졸업을 하고도 '영어'라는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분야에 종사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영어'는 밥상의 '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핵심적인 위치라서가 아니고 어디든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밥은 국과 따로 먹어도 맛있고, 반찬이 짤 때 한술 떠도 되고, 볶아 먹어도 맛있고, 말아먹어도 맛있습니다. 어디에서나 기본은 하죠.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글로벌한 시대인 요즘, 영어는 정말 어디가 가져다 붙여도 다 쓸 데가 있습니다. 당장 독자님들께서 떠올릴 수 있는 분야 중 영어가 하나도 관여하지 않은 분야는 과연 몇 개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로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만큼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이 없죠.


하지만 여기서 이 분야 전공의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합니다. 바로 '밥' 역할이라는 점입니다. 아니, 방금은 '밥'과 같아서 여기저기 잘 쓰인다고 해놓고 웬 단점이냐고요? '밥'은 국, 반찬 등과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단독으로 먹는 사람은 드물죠.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학문에 두루 쓰이는 장점이 있지만, '영어만' 잘하는 사람은 요즘 세상에 거의 없으며, '영어도' 잘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학부 수업 때, 다른 과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학도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는 매우 쉽지만, 영문학도에게 공학을 가르치기는 매우 어렵다'. 영문학 전공자로서 참 씁쓸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심지어 공학도 중에는 굳이 영어를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완전 드물죠.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영어만 좋아하고, 공학은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숫자와는 영 친해지기 어렵더라고요. 물론 숫자와 절친이었다면 영어영문학도 전공하지 않았을 테지요. 우리나라 사회에서 저 같은 사람을 '경쟁력 없다'라고 봅니다. 취업 시장은 공학 전공자가 소위 말하는 깡패인데, 문과에 아무 경쟁력 없는 영문학 전공자는 어디 들이밀 데가 없는 게 현실이죠. 하지만 어떡합니까. 제가 좋아하는 건 영어 공부이고, 이미 그런 인생을 살아왔는데 말이죠.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요. 남들이 경쟁력 없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 자체로 경쟁력이 생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번역 업계에 발을 담가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건 2017년 여름쯤이었습니다. 당시 좋은 기회가 생겨 실무 경험차 일반 마케팅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해외 브랜드의 마케팅 담당을 맡았었는데, 거기서 소위 사회생활의 매운맛을 제대로 봤습니다. 사내 정치와 인간관계에 신물이 나 버린 저는 '혼자서만 잘하면 되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고, 여러 방면으로 서치를 하던 중 모 번역가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며, 우아하게 키보드 앞에 앉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자신의 업무를 처리해 내는 모습. 그 글에 매료되어 고민 끝에 다니던 회사의 퇴사를 결심하고,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