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탱커 스탯 기록부
예전에 TV에서 이런 밈(meme)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니, 다 경력직만 원하면 도대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나?!". 참 안타까운 말이죠. 경력을 쌓으려면 신입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신입은 받아주는 데가 없으니 대체 어디서 경력을 쌓아야 하는지의 울분이 아주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다른 업계는 그래도 어느 정도 신입이 뚫고 들어갈 자리가 있기는 합니다. 공개적으로 신입 정규 직원을 모집하는 곳도 있고, 안 되면 계약직이라도 뽑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번역 업계는 유독 '신입'이 설 자리가 많이 부족한 듯 보입니다. 업계에 아는 분이 계시다면야 그래도 한시름 덜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 자신을 어필합니다.
직접 이력서를 뿌리고 담당자의 마음에 들어 간택(?) 당하는 게 제일 베스트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으므로, 보통은 아카데미를 많이들 권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돈으로 경력을 산다'는 느낌이 강하죠. 뭐, 저도 별수 없는 사람이라 영상 번역 아카데미를 들어갔습니다. 참고로 먼저 말씀드리자면 아카데미 홍보글 같은 거 전혀 아닙니다. 안 다니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무튼 몇 달간 영상 번역 업계에 대해 배우고 쓰이는 툴에 대해 익히면서 점차 번역가로서 한 발자국 나아갔습니다.
약 1년 동안의 '유료 경력 코스'를 완주하고, 드디어 아카데미에서 이어준 몇 편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상 번역가는 분당 몇 천 원씩 받는다는데, 그럼 60분짜리 하면 용돈 벌이 쏠쏠하겠네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무사히 궤도에 안착한 번역가에겐 맞는 말이지만, 저 당시의 저에겐 완전히 틀린 말이었어요. 아카데미에서 연결해 주었기 때문에, '중간 수수료'를 꽤 많이 떼어갔기 때문이죠. 원청에서 10,000원에 의뢰를 했다면 (요율은 정확하진 않지만) 아카데미에서 4,000원 정도를 가져가고, 초보 번역가라는 이유로 별도 감수비를 가져가 또다시 3,000원이 차감됩니다. 결국 열심히 번역해서 받은 돈은 3,000원 정도였던 거죠.
처음 번역했던 작업은 야생 모험 덕후인 외국의 한 영화배우가 정글, 바다, 사막, 동굴 등 여러 장소를 탐험하며 그 안에 서식하는 신기한 생물들을 발견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였습니다. 1인 체제의 다큐멘터리치곤 대사량이 상당히 많았던 거로 기억하네요. 40분 내지 50분 사이의 분량이었는데, 초보라 그런지 속도가 영 나지 않아 거의 3일 ~ 4일은 소모됐던 거로 추측됩니다. TV 방영 예정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볼 거라고 생각하고 정말 혼신을 다해서 번역했던 기억이 있네요. 마침내 납품을 하고 방영 날짜까지 정해지자 우리 아카데미 동기 카톡방은 그야말로 감격의 눈물바다였습니다. '우리가 드디어 프리랜서로 데뷔를 했구나!' '그간의 고생이 스쳐 지나간다' 등 다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내비쳤더랬죠. 저도 가족들에게 내가 번역한 프로그램이 TV에 나온다고 홍보(?)를 했고, 그날 온 가족(심지어 저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이 TV에 둘러앉아 '징그러운 거미가 나오는' 그 다큐멘터리를 모두 시청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우리 손자 대견하다고 칭찬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네요.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연결해 주는 다큐멘터리 몇 편, 영화 한 편, YouTube 영상 몇 편을 번역하며 번역사로서 경력을 쌓아나갔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프리랜서로 번역을 하면 월에 내가 원하는 수익을 벌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모든 프리랜서가 궤도에 오르고 싶어 하는데, 모든 프리랜서가 궤도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가 머리에 찍혔죠. 그래서 '작은 경력이라도 살려서 기업 내 인하우스 번역가로 들어가자'는 결심이 섰습니다. 회사 속 인간관계와 사내 정치에 질려버렸던 저였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괜찮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저를 다시 '입사 지원' 버튼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생각이 든 후, 몇 편 안 되는 번역 경력을 모아 작성한 포트폴리오와 나름 열심히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구직 사이트에 등록했고 며칠 안 되어 드디어 제가 '가장 많은 배움을 받았던 회사'에서 입사 제안이 오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