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탱커 스탯 기록부
회사에서 보통 채용한 직원의 직무를 정할 때 대개는 처음부터 공고에 명시를 합니다. '마케팅팀 팀원 모집', '인사팀 팀장급 모집' 등등 말이죠. 이 회사도 제가 지원했을 당시 공고에는 '번역 담당자(번역가)'를 모집한다고 적혀 있었어요. 제 경력이(길진 않지만) 번역에 대한 경력뿐이라 당연히 번역 업무를 하게 될 줄 알았기에 저도 여기에 지원한 거고요. 수습 기간인 3개월이 끝나고, 저희 부서 부장님께서 저를 따로 회의실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저에게 번역 담당이 아닌 프로젝트 매니저 직무를 제안하시던 겁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직무를 해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저는 '이게 무슨 직무지?' 싶었어요. 한편으로는 '내 번역 실력이 그렇게 별로였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사측에서도 급작스러운 제안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다행히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제 성격이나 업무 스타일을 3개월 동안 회사에서도 관찰해 봤는데, 앉아서 번역만 하는 직무보다는 직접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하며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는 프로젝트 매니저 직무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이 되어 그런 제안을 주셨던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 회사가 첫 회사고, 번역 업계에 대해 나름 부푼 꿈을 꾸고 발 담근 만큼 사실 전 뭐든 '번역 일을 한다'고 하면 환영이었습니다. 인하우스 번역가든 프로젝트 매니저든 말이죠.
그래서, 보시다시피, 회사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신입이라 '아, 전 그 직무는 별로입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부족했던 이유도 있고, 해보지도 않은 영역인데 무작정 고사하기도 싫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그날 부로 저는 인하우스 번역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었고, 줄여서 번역 PM이라고 하는 직무로서의 커리어를 쌓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제가 입사 면접 이전 회사 홈페이지에 '블리자드'와의 협업 경력이 있는 걸 보고 소위 '블리자드 덕후'로서 굉장히 가슴이 뛰었다고 말씀드렸는데, 프로젝트 매니저 직무를 맡자마자 블리자드를 제가 이끌게 되었답니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가장 즐겨하는 '오버워치'의 번역 프로젝트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비록 인게임 번역이 아닌 마케팅 번역이었지만, 어쨌든 게임 용어나 프로 선수 이름, 별명, 조합명 등 평소에 관심 있던 용어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일하기 정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일부 작업은 번역 분량이 적거나 하면 PM이 처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번역가와 리뷰어의 손을 거친 뒤, 최종 납품 이전 PM이 마지막 검수를 거칩니다. 그렇지만 블리자드 프로젝트는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작업이었기에 최종 납품 시 제가 더 꼼꼼하게, 재미있게 볼 수 있었어요. 번역가나 리뷰어에게는 해당 게임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고, 단순히 처리해야 할 일 정도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게임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이거 말고도 번역해야 할 게 산더미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에게는 정말 운이 좋게 가장 좋아하는 게임의 번역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었고, 그래서 제가 번역가나 리뷰어보다 이 게임은 아는 게 훨씬 많다고 자부할 수 있었죠. 그랬기 때문에 다른 프로젝트와는 다르게 먼저 능동적으로 피드백도 드리고 용어집도 더 상세하게 제작했으며 작업 가이드 역시 '*무위키' 저리가라고 할 만큼 자세하게 적었어요.
'좋아하는 모든 게 합쳐지면 이렇게 시너지가 날 수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 만큼 일하는 게 참 행복했습니다. 비록 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상태로 입사했기 때문에 처우 부분에서는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진짜 덕업일치를 이뤘다는 메리트가 그 단점을 상쇄했습니다. 덕분에 첫 몇 달은 퇴근하면 무언가 꽉 찬 느낌이 들며 알찬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PM으로서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