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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gNew Feb 23. 2024

[5] 번역 스릴러: Missing Files

번역 탱커 스탯 기록부

업계가 워낙 파이도 작고, 그러다 보니 실제로 이 바운더리 안에서 업을 이어가시는 분도 다른 직종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긴 하지만 일단 여기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은 '진짜로' 번역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한 번 판 구덩이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구덩이 한 자리 하고 있고(작은 크기긴 하지만) 여기서 나갈 생각은 현재로서는 없어요.


하지만 PM 일이라는 게,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굉장히 반복적인 업무의 연속입니다. 새롭다고 해 봐야 새로운 고객 또는 새로운 문서 형태 정도죠. 크게 보면 번역 파일을 받아서 일정을 조율하고 견적을 보낸 다음 번역사와 컨택하여 번역을 진행하고 파일을 넘겨받아 최종 확인 후 고객에 납품하는 프로세스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예요. 그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변수는 파일 종류나 고객 성향 등이 있죠. 다만 이 부분도 몇 번 하면 다시 그야말로 '루틴'이 되어 버립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프로젝트는 없다'는 제 사수의 말이 바로 이런 거죠. 예전에 잠깐 유행을 탔었던 말 중 이런 게 있습니다. "익숙함에 속아 OOO을 잊지 말자."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는 PM은 익숙함에 속기 딱 좋은 직업이죠. 그러다 보니 그런 익숙함에 푹 젖어서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때는 한 2021년 여름쯤이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여느 때와 같이 여러 고객께서 의뢰를 주셨었고, 저는 "익숙하게" 업무를 처리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했죠. 물론 발생할 당시에는 몰랐고 납품할 때가 되어서야 알았죠. 일의 발단은 이랬습니다. 당시 사내에서는 Outlook이라는 메일 앱을 사용했는데요, 일부 고객께서는 첨부 파일에 번역해야 할 파일을 직접 첨부하여 주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보안 등의 이유로 고객사에서 사용하는 클라우드 접속 권한을 주거나 제3의 툴을 사용해 전달을 해주시는데 원래는 이 고객사(A라고 칭하겠습니다)도 자체 보안 서버에서 파일을 다운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따라 파일이 간단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직접 메일에 첨부를 해서 주시더라고요. A는 꽤나 보안이 철저한 회사라 처음엔 좀 의아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곤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작업에 착수했죠.


제 기억으로는 그 프로젝트 볼륨이 상당했었어요. 왜냐면 무려 '새 확장팩 인게임 텍스트'와 거기에 등장하는 '아이템 명칭'까지 전부 통으로 의뢰가 됐었거든요. 게임 번역 문서는 태그가 상당히 많아서 콘텍스트나 의미 파악이 어려울 때가 있는데, 이번 건은 어쩐 일인지 지저분하지 않고 깔끔해서 눈누난나 스무스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납품 전에도 PM QA를 진행하면서 "음, 역시 이 회사가 게임 하나는 잘 만들어"라는 감상까지 했죠. 그리고 이윽고 납품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완벽하게 번역이 들어간 문서를 메일에 첨부한 당당히 "자, 받으십시오! 의뢰하신 번역입니다!"를 시전했습니다(속으로요^^).


... 그리고 시간 담당자님께 온 메일 한 통. "PM님, 아이템 명칭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수신자는 제 이름. 참조에 걸려 있는 팀장님과 부장님, 그리고 관련 팀원들. 굳어 버린 표정, 마우스를 잡은 손에서 흐르는 식은땀, 갈 곳 잃은 키보드 위 손가락.


게임을 조금 해 보신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아이템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게임 텍스트는 어떻게 보면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한 대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템은 그 위상이 조금 다르죠. 승패를 판가름할 수 있는 크리티컬한 요소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템빨'이라는 용어까지 있을까요. 그런 중차대한 요소의 번역을 제가 빼먹은 겁니다.


Outlook을 쓰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첨부 파일을 다운로드받는 옵션이 보통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이름으로 저장]이고 다른 하나는 [첨부 파일 모두 저장]입니다. 전자는 선택한 파일 하나만 저장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말 그대로 첨부돼 있는 모든 파일을 내려받는 것이죠. 파일 한 개만 선택해도 후자를 누르면 자동으로 모든 파일이 다운받아집니다. 위 프로젝트는 인게임 텍스트를 구성하는 3개 파일은 알집에, 나머지 아이템 명칭은 개별로 2개로 나뉘어 요청이 왔던 거로 기억합니다. 즉 총 3개 뭉치로 의뢰가 됐던 거죠. 그런데 그만 제가 거기서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클릭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알집 하나만 다운로드 받은 채로 작업에 착수한 것이죠. 그러면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견적 보낼 때 티가 나지 않나요?" 네,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알집에는 3개의 파일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제 머릿속에서는 "오케이, 파일 여러 개 의뢰됐었는데 다 있군"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알집에 들어 있던 그 3개 파일이 분량이 상당했고, 나머지 두 개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터라 견적에 포함이 안 됐어도 티가 안 났던 거예요. 고객 담당자도 오랫동안 거래했던 분이고 하니 서로 신뢰가 두터워(?) 저희가 보낸 견적 그대로 품의를 올려버렸던 거고요. 번역사는 애당초 파일 개수가 몇 개였는지 알지도 못했죠. 그렇게 프로젝트가 진행이 됐던 겁니다.


이건 명백히, 파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진행한 PM의 잘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세 가지 선택지가 생깁니다. 첫째, 놓친 번역에 대한 견적을 새로 짜서 전달하고 빠른 시일 내에 번역을 완료한다. 둘째, 우리 잘못이기 때문에 별도 비용을 받지 않고 무료로 추가 번역을 진행한다. 셋째, 신뢰가 깨졌으니 타 업체에 새로 의뢰한다. N차 벤더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고객은 갑(甲)의 위치입니다. 을(乙)이 일을 똑바로 못했을 경우 과연 갑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둘째나 셋째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왜 첫째는 아닐까요?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악역 같은 느낌이 들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너희가 잘못해 놓고 왜 우리 보고 돈을 다시 달라고 하는 거야? 너네 잘못이니까 우린 돈 더 못 줘."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이게 정상이죠. 이런 말 듣기 싫으면 처음부터 파일 개수를 잘 확인해서 정상적으로 견적을 올렸으면 되는 겁니다. 떼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거든요.


결론적으로는 두 번째 옵션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첫 번째는 기대하지 않았었고(실제로도 안 이루어졌고), 세 번째는 그래도 여태까지 함께한 정(?)이 있기 때문에 제외되었습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가장 무난한 선택지였죠. 그 고객 담당자도 상사가 있을 텐데, '제가 맡은 벤더가 일을 잘못해서 우리가 추가 금액을 주어야 한답니다'고 보고하면 과연 좋은 말을 들을까요. 저희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입니다. 대량 작업이었다면 시간도 못 맞췄을 거고 그에 따른 손해도 엄청났을 테니까요. 어쨌든 이 번역을 맡았던 번역사와 빠르게 컨택하여 놓친 부분의 번역을 완료할 수 있었고, 고객도 더 이상 추가적인 요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사히 아이템 명칭 번역까지 넘긴 뒤에야 숨을 좀 돌릴 수 있었죠.


저는 이 사건 뒤로 Outlook의 첨부 파일이 포함된 메일은 그것들을 저장할 때 개수에 상관없이 [첨부 파일 모두 저장]을 누르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저런 실수로 어찌 됐건 제가 소속된 회사에 금전적인 손해를 입힌 건 맞으니까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무조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느슨한 제 일상에 긴장감이 팍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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