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경 49재를 올렸다. 우리 가족, 형님네 가족, 셋째 언니가 참석했다. 재를 올린 후 언니는 직장으로 가고, 남은 사람들은 우리 집으로 왔다. 형님네 가족들이 오랜만에 왔다. 남편이 병원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주말마다 들렀는데 남편의 병원행 이후 처음이다. 거의 반 년만이다.
주인 없는 집에 온 것처럼 다들 겉도는 느낌. 앉을지 서 있을지조차 모르겠다는 듯 불안과 낯섬으로 서성인다. 텅 빈 눈동자처럼 집안 공기마저 푹 꺼져보인다. 각자가 품고 있는 생각의 차이만큼 좁혀질 수 없는 정서적 거리가 보인다. 이 심리적 거리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49재, 한 사람을 아주 떠나보내지 못하고 여전히 다 하지 못한 뭔가가 남아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무엇일까. 함께 살아가다 같은 시에 가자고 맹세해놓고 먼저 떠나보냈다. 떠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이리 허망하고 마음의 고갈을 가져올지 몰랐다. 49재를 지내고 나면 뭔가 정리가 되리라 여겼는데 그 이별식이 사람의 마음을 더 황량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차차 이 집안의 빈자리는 채워주리라. 사실, 빈자리라는 것은 실재하기보다는 추상적인 분위기 같은 거다. 존재하긴 해도 느끼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면 없는 거나 진배없는 그 무엇. 무덤덤하게 지내면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 무정한 자연물이면서 부재한 그 무엇. 그런 생각을 하자니 비상 없는 추락의 강으로 곤두박질한 느낌이다. 그것은 감성을 자극하여 사람을 한없이 침잠케 한다. 나른하고 무기력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남편의 빈자리는 일상을 무력화시킨다.
잠을 설치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더니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날이 갈수록 남편의 자취는 내 주위에서 사라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남편의 얼굴은 자주 내 머릿속으로 고개를 내민다. 생과 사가 교차되는 순간의 얼굴, 병실에서의 모습, 영안실에 막 도착하여 임종 옷을 입을 때의 얼굴, 입관시의 대리석처럼 차갑고 선뜻한 그 얼굴. 시도 때도 없이 나쁜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화면이 바뀌어 남편의 살아생전의 모습이 등장한다 해도 그렇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49재를 기점으로 이곳에 걸치고 있던 발을 아주 거둬 저 망각의 세계로 건너가 버린 것일까. 남편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내 삶에 남편의 존재는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를 했던 것이지? 이런 무의미한 자문은 왜 하고 있는가? 씨실과 날실로 엮은 피륙이 나와 남편이 일군 삶이었다면, 남편이라는 씨실을 잃음으로써 나의 날실까지 얽히고 섞여서 우리의 피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일까. 아니다. 우리의 피륙은 여전히 고운 빛과 질감으로 함께 한 세월을 간직하면서 내 생이 다할 때까지,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이들 세대로 전해질 것이다. 그러니 살았던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자.
영혼이 육체에 깃들어 살든, 살지 아니 하든 우리 모두는 언제나 심적인 떠돌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당신이 방랑한다고 해서 그리 애통해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저 광활한 우주 속에서 떠도시라. 때가 되면 나는 당신을 만나러 그곳까지 가는 길을 결코 마다하지 않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