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회의를 독하게 짊어지며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
독한 회의를 독하게 짊어지며
유치환의 〈생명의 서〉는 삶의 무게를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의 ‘시적 경험’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아직도 삶의 무게는 잴 길이 없어, 나는 그 무게를 시의 형상으로 등에 지고 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한 인간의 존재를 붙잡아 흔들며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긴장감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시의 도입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라는 구절에서 나는 한 번 멈칫하게 된다. 도대체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냥 회의도 아닌, ‘독한’ 회의라니. 무엇을 향한 질문이고 무엇을 의심하는 마음인가. 이 대목은 마치 신라의 향찰로 된 향가를 해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리송한 뜻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문 앞에서 거절당하듯 되돌아서야 하는 기분. 베일로 감추어진 그 회의를 독하게라도 열어젖히고 싶지만, 구절양장 같은 길에서 맴돌 뿐이다.
어쨌든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이어지는 것은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이다. 그때 화자는 왜 갑자기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고자 하는가. 하필 왜 그곳인가. 그곳은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놓인 공간이다. 일체가 사멸한 공간에서는 욕망도 관계도 문명도 모두 모래 속에 묻혀 사라진다. 화자는 바로 그 극단의 고독 속에서만 인간이 ‘나’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마주설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고독의 극점에서만 인간은 그 어떤 의미 체계에도 기대지 않은, 문명 이전의 원초적 자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독한 회의’의 정체도, 삶의 애증도, 그 무엇도 사막이 아닌 곳에서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자태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수행적 맥락, 번뇌를 걷어내고 ‘참자아’를 찾으려는 사유에 닿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시인이 소환하는 신은 부처가 아니라 알라의 신이라는 점이다.
이 낯선 조합은 이 시의 독특한 긴장을 완성한다. 동양의 수행을 가진 사유 속에 서구의 유일신을 호출함으로써, 유치환은 어떤 종교나 문화권에도 고정되지 않는, 오직 ‘생명’ 그 자체에 더 밀착된 절대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제목 또한 이 난해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생명의 서〉에서 ‘서(書)’는 흔히 편지로 풀이되지만, 이 글자는 본래 편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글, 문서, 기록, 심지어 경전적 문서까지 포괄하는 넓은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것은 생명에 대해 쓴 한 편의 편지인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가 인간에게 건네는 근원적 기록인가. 시인은 제목만으로도 독자를 삶의 근원 앞에 세워두고, 이 글을 쓴 주체가 누구이며 수신할 존재가 누구인지부터 다시 묻게 한다.
어쩌면 유치환은 이 모호함을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생명은 단정할 수 없고, 의미는 고정되지 않으며, 오직 이 기록 앞에 선 인간만이 그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제목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는 삶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배우려는 의지를 선언한다. ‘원시의 본연한 자태’라. 이미 인간의 옷을 걸쳤던 자가 다시 태곳적 강물로 회귀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의지는 단단하다. 배우지 못한다면 백골이 되어서라도 그 자리에 남겠다는 결연함이 오히려 생을 향한 가장 강렬한 의지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생을 놓지 않으려는 노래로 기억한다. 이 노래를 알게 된 뒤로는 삶이 어둠으로 기울 때마다, 그 무게를 시적으로 받아들이며 한결 가볍게 건너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