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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69

독한 회의를 독하게 짊어지며

by 인상파

유치환의 〈생명의 서(書)〉


독한 회의를 독하게 짊어지며


유치환의 〈생명의 서〉는 삶의 무게를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의 ‘시적 경험’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아직도 삶의 무게는 잴 길이 없어, 나는 그 무게를 시의 형상으로 등에 지고 있다. 시를 읽을 때마다 한 인간의 존재를 붙잡아 흔들며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긴장감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시의 도입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라는 구절에서 나는 한 번 멈칫하게 된다. 도대체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냥 회의도 아닌, ‘독한’ 회의라니. 무엇을 향한 질문이고 무엇을 의심하는 마음인가. 이 대목은 마치 신라의 향찰로 된 향가를 해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리송한 뜻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문 앞에서 거절당하듯 되돌아서야 하는 기분. 베일로 감추어진 그 회의를 독하게라도 열어젖히고 싶지만, 구절양장 같은 길에서 맴돌 뿐이다.


어쨌든 존재의 근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이어지는 것은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이다. 그때 화자는 왜 갑자기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가고자 하는가. 하필 왜 그곳인가. 그곳은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놓인 공간이다. 일체가 사멸한 공간에서는 욕망도 관계도 문명도 모두 모래 속에 묻혀 사라진다. 화자는 바로 그 극단의 고독 속에서만 인간이 ‘나’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마주설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고독의 극점에서만 인간은 그 어떤 의미 체계에도 기대지 않은, 문명 이전의 원초적 자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독한 회의’의 정체도, 삶의 애증도, 그 무엇도 사막이 아닌 곳에서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자태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수행적 맥락, 번뇌를 걷어내고 ‘참자아’를 찾으려는 사유에 닿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시인이 소환하는 신은 부처가 아니라 알라의 신이라는 점이다.


이 낯선 조합은 이 시의 독특한 긴장을 완성한다. 동양의 수행을 가진 사유 속에 서구의 유일신을 호출함으로써, 유치환은 어떤 종교나 문화권에도 고정되지 않는, 오직 ‘생명’ 그 자체에 더 밀착된 절대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제목 또한 이 난해함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생명의 서〉에서 ‘서(書)’는 흔히 편지로 풀이되지만, 이 글자는 본래 편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글, 문서, 기록, 심지어 경전적 문서까지 포괄하는 넓은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것은 생명에 대해 쓴 한 편의 편지인가, 아니면 생명 그 자체가 인간에게 건네는 근원적 기록인가. 시인은 제목만으로도 독자를 삶의 근원 앞에 세워두고, 이 글을 쓴 주체가 누구이며 수신할 존재가 누구인지부터 다시 묻게 한다.


어쩌면 유치환은 이 모호함을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생명은 단정할 수 없고, 의미는 고정되지 않으며, 오직 이 기록 앞에 선 인간만이 그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제목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는 삶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배우려는 의지를 선언한다. ‘원시의 본연한 자태’라. 이미 인간의 옷을 걸쳤던 자가 다시 태곳적 강물로 회귀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의 의지는 단단하다. 배우지 못한다면 백골이 되어서라도 그 자리에 남겠다는 결연함이 오히려 생을 향한 가장 강렬한 의지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생을 놓지 않으려는 노래로 기억한다. 이 노래를 알게 된 뒤로는 삶이 어둠으로 기울 때마다, 그 무게를 시적으로 받아들이며 한결 가볍게 건너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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