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상파 Mar 21. 2024

간병일기 38

쇠락의 길

쇠락의 길


잠자기 전, 남편의 망각증은 최고조에 달하는데 그것은 몸의 피로에 비례해 보인다. 멀쩡한 사람도 그때가 되면 가장 피로를 느낄 때이기는 하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뇌가 힘들다. 아니 뇌가 받쳐주지 않으니 몸이 힘들다. 약 먹는 것과 씻는 것으로 밤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다. 피로가 극에 달한 자정 무렵, 남편의 뇌는 가장 쇠락의 길을 걷는다.


소파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수>를 읽으면서 남편이 잠들기 전에 욕실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들여다볼 계획이었다. 남편은 늘 머리 감을 때 욕실 문을 닫고 감는데 오늘은 남편에게 욕실 문을 열어두고 감을 것을 부탁했다. 별 소리없이이 문을 열어둔 채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 닦고 발 닦는 것은 자주 봤지만 머리 감는 모습은 잘 보지 못했다. 건선이 있는 두피에 니조랄 액을 묻혀 거품을 낸 후 손톱으로 박박 긁으며 물로 헹구더니 그 같은 과정을 두어 번 반복했다. 내복 속으로 물이 흘러들어가는 것 정도는 상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아무 느낌이 없는 것일 수도. 그리고는 머리를 말리려고 수건으로 짧은 머리털 끝을 탁탁 털어냈다.

 

화장실 문에 기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머리 감아 시원하겠네요!”라고 한마디 던졌더니 남편은 정색을 하며 "무슨 머리를 감았느냐?"고 되물었다. 니조랄 뚜껑이 열려있는 것과 내복이 젖은 것 따위를 열거하면서 머리감은 사실을 확인시켰지만 막무가내로 안 감았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안되겠다. 다시 감으려고 고집을 부릴 것이니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감겨 주겠다고 나섰다. 남편이 하던 대로 그대로 따라 했다. 안 감았다고 또 억지를 부리면 오늘은 감지 말고 내일 감자고 사정이라도 할 태세였는데 감겨 줬더니 아무 토를 달지 않는다. 한시름 놨다.


망각의 늪을 건너고 있는 사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 역시 그 늪을 함께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편의 현실이 내 현실이고, 남편의 몸이 내 몸이고, 남편의 정신이 내 정신일 터.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으로 치환된다. 나는 남편으로 살고 있으나 남편은 나로 살지 못하지만.


한밤중의 이 소란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사람의 진을 아주 빼놓는다. 총명하고 영민하던 사람이 저렇게 망가져가는구나! 저렇게 바보가 되어가는구나! 예전의 기억이 작두날에 짚 뭉치 잘려 나가듯 싹둑 잘려나가고 있구나! 기억되지 못하는 현재는 순간에서 끝나버리고 마는구나! 어떤 행동도 몸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곧바로 흩어져버리고 마는구나! “모르겠다.”와 “안 했다.” 사이에서 남편은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구나!( 2011년 1월 4일 화요일)

작가의 이전글 간병일기 3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