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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혁 Apr 18. 2022

그곳에도 자본주의가 있었다.

아름다운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 이야기, 산토리니

산토리니.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자료를 찾기 전까지 '나나나~'라는 배경음과 손예진 배우의 얼굴만이 내 기억에 남는 이미지였다. 2000년대 초반 포카리스웨트 광고로 워낙에 유명해져 버린 아름다운 그곳. 여행지를 검색하면서 반해버린 그 풍광에 빠져버린 것도 잠시, 가는데 엄청난 고행길이 예상되었다. 인천에서 아테네를 가는 직항노선도 없는 마당에 산토리니 직항은 기대할 수 없다. 12시간에 걸쳐 도착한 이스탄불에서 경유를 하고 아테네 공항에서 4시간을 노숙한 끝에 산토리니에 간신히 들어갔다. 심지어 이스탄불에서 아테네에 바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없어 공항 옆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바로 아침 비행기를 탔다. 산토리니에 들어가기 위해 탔던 생전 두 번째로 탔던(몇 년 전 로마에서 스플리트를 들어갈 때 처음 탔다.) 프로펠러 형 비행기는 여전히 적응이 아닌 약 40분간의 비행 내내 긴장감을 선사해주었다. 

도착 후 체크인한 빌라는 분위기도 사이즈도 너무 맘에 들었다. 그렇게 운 좋게 빌리게 된 산토리니의 숙소는 장장 26시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도달한 그곳의 야경을 품에 안게 해 주었다. 그 야경에 취해 동생과 숙소에 들어오는 길에 산 mede in Santori 와인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꺼내 테라스에 앉았다. 잘하지도 못하는 알코올을 홀짝이며 허세 가득한 멋 부림, 그리고 아름다운 야경은 26시간의 여정을 무디게 만들어주었다. 달콤한 화이트 와인처럼 낭만의 그곳, 광고 속 바로 그곳, 산토리니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다시 아침이 밝았다. 저녁 무렵 도착한데 이어 와인도 한 병을 다 비우고, 시차까지 적응이 덜 되어 느지막이 일어날 법도 하건만 동생이나 나나 일지감치 눈을 떴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에 거리를 활보해보자면서 숙소를 나셨다. 누구나 산토리니라는 단어에 낭만과 아름다운 섬마을을 생각하리라. 하지만 우리가 숙소에서 나와서 먼저 만나게 된 것은 사람이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노부부, 카페를 운영하는 은퇴한 할머니, 공공버스의 검표원으로 일하는 청년, 아침 일찍 잡은 생선을 가져다 좌판에 나온 할아버지, 학교에 가는 아이들. 관광시즌도 아니던 3월 말 4월 초에 주말도 아닌 시간이다 보니 생각보다 산토리니의 일상을 먼저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나서서 우리가 익히 아는 산토리니를 만나러 향했다. 광고 속 하얀 벽에 파란색 지붕이 하늘과 맞닿는 그곳을 찾아서. 

본래 산토리니는 지금보다 좀 더 큰 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1500년 경 화산 폭발로 섬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바닷물이 차오른 칼데라가 형성되었다. 이 폭발로 원래 섬의 가운데 부분은 우리가 산토리니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물들이 들어왔고 맞은편에 보이는 작은 섬들이 산토리니와 원래는 하나의 섬이었다고 한다. 화산 폭발의 흔적으로 산토리니에는 화산 절벽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그 위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산토리니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산토리니 곳곳을 여행하다 보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 도로를 만나는데 이것들이 다 화산 폭발의 영향 때문이다.


그렇게 깎아지른듯한 절벽의 좁은 길을 지나면, 우리가 아는 산토리니 마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일찍 나온 덕분인지, 관광 비수기여서 그런지 이른 아침시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적어 마음껏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얀 벽과 파란색은 너무나 완벽한 궁합이었다. 하얀색 벽들은 때때로 파란 하늘과 지중해 그 자체를 지붕 삼아 머리 위에 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완벽했다.

그렇게 화사하면서도 청초한 섬을 만나고 숙소 근처로 내려왔다. "솔트 앤 페퍼" 다시 말하면 "소금과 후추"가 되는 피식 웃음 짓게 하는 음식에 식당에 들어갔다. 주린 배를 끌어안고 들어선 이곳에서 주문한 스테이크와 파스타는 만족스러웠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노부부는 당일 무슨 일에선지 그 시간 앉아있던 몇 테이블 없던 손님들에게 디저트를 모두 서비스로 주었다. 허허 털털 웃으며 카운터에서 '쏜다!'를 외치는 할아버지와 미소로 디저트를 가져다주시던 할머니의 다정함이 낯선 여행자들에게는 따스함으로 다가왔다. 

푸짐한 디저트까지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근처에 카페를 찾아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도중 엔틱 한 분위기에 동네 개님이 드나드는(?)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망설이지 않고 들어간 카페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달달한 라떼에 홈에이드 와플까지 나오니 카페에서 길거리 그리스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카페에도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차림의 어른들이 잠깐 들려 에스프레소를 원샷! 하더니 낯선 관광객을 어색해하며 주인아주머니와 안부 정도를 이야기하는 듯하고는 황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가장 편하게 앉아서 우리를 쳐다보는 이는 이 집 터줏대감 개님이었다. 그리고 손님도 없겠다. 심심하셨는지 주인아주머니가 그리스 억양의 영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안토닌 아줌마는 당시 57살이었다. 그때쯤 어머니 나이와 비슷해서 그런지 친근한 아줌마의 인상에 예정에 없는 카페에서의 수다시간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을 하다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은퇴한(다른 사람들을 대체로 70세에 은퇴를 한다고 한다.) 안토닌 아주머니는 은퇴 후 한적한 이곳에 카페를 시작하셨다. 아마도 추측이지만, 와이너리와 주얼리 샵을 동시에 경영하고 있다는 사업가 남편 분의 사업 상황이 나쁘지 않으신 눈치셨다. 하나 있는 아들은 아줌마의 아버지처럼 선장이 되기 위해 데살로니키에서 훈련을 받고 있단다. 어느 어머니들처럼 아들 이야기에 자랑스러움 뿜뿜에 눈 빛이 반짝이셨다. 아주머니의 아버지는 선장이셔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셨단다. 아주머니 부모님의 취향이셨는지 집에는 중국풍 장식이 가득했단다. 아마 아주머니의 동양에 대한 익숙함이 낯선 여행자들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오실 수 있었던 이유 아니었을까.


산토리니는 정말 따뜻한 곳이란다. 우리가 으레 겨울이라고 느끼는 기간에는 바람이 차고 싸늘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눈은 잘 안 온단다. 3월의 바닷바람을 맞아본 우리로서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아주머니의 표현으로는 이곳엔 봄과 여름만 있다고. 당신은 태어나서 처음 눈을 봤을 때가 6살 때였는데 할머니가 접시에 눈 녹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새삼 신기해했다는 추억을 이야기하셨다. 그러면서 산토리니를 여행하기 가장 좋을 때는 8월 20일 이후, 베스트는 9월이라는 현지인 팁을 주었다. 만약에 수영을 하지 않는다면 11월까지도 좋다고 한다. 맑고 청량한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창 여름휴가시즌에 산토리니를 찾는다고 한다. 5월부터 본격적인 관광시즌이 시작되어 6-7월에 절정을 이루는데, 거주민인 2-3천 명 정도가 고작인 이 작은 섬에 하루 백만 명이 왔다 갔다 한다니 숙박과 교통이 전쟁이 따로 없단다. 


그러면서 6-7년 전 그리스의 경제 위기 이후 청년들을 중심으로 그리스, 그리스 경제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쉰다. 청년들이 성공을 찾아 미국이나 유럽연합인 영국(당시는 브렉시트 전이었다.)으로 떠나기를 바라고 실제로 많이들 떠난다고 한다. 기회를 찾아 수도인 아테네로 떠났던 청년들은 수도의 물가를 견디지 못해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 저택으로 돌아간단다. 산토리니는 관광객들 덕분에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지는 않지만 청년들은 이곳을 떠나기를 바란다고 한다. 문득 유럽을 넘어오며 비행기에서 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반복되는 삶과 느릿한 시골보다는 도시로, 성공을 찾아 떠나고 싶은 청년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따뜻한 밥 한 끼 차려먹는 것도 사치라며 삼각김밥을 종용하는 치열하다 못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영혼 없는 경쟁과 나라는 기계부품의 영혼을 갈아 넣어서 움직이는 회사였다. 그 안에서 방황하고 길을 찾는 청춘들의 모습. 어느덧 저녁 무렵에 다다라 아주머니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주머니는 반갑게 우리와 사진을 남기고, 산토리니에 언젠가 꼭 다시 오라며 웃으며 배웅해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카페를 나섰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산토리니지만, 아름답기만 그곳도 역시 우리네와 비슷한 고민과 방황이 가득한 사람 사는 동네였다. 그리고 문득, 예전 처음 산토리니 사람들이 다른 색의 벽을 칠할 돈이 없어서 하얀색 벽을 칠했지만, 지금은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관광을 위해서 하얀색 벽을 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카페 맞은편에는 곧 시작될 관광시즌을 위해 하얀색 페인트를 칠하는 집의 공사 흔적이 남아있었다.



산토리니, 그곳에도 자본주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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