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럽을 걸었던 과거를 쓰기 시작한 이유
28살 이제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많지도, 그렇다고 청춘들의 기준에는 적지도 않은 그 나이에, 나는 처음 유럽을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8살 그때까지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공부한다고 아직 병역도 마치지 않은 나에게 유럽행 비행기는 엄청난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사실 출발하기 며칠 전까지는 분명히 생애 첫 유럽행이 너무나 떨렸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전 날부터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유학 준비한다고 영어를 하긴 한 것은 맞는데 지금까지 해외에서 영어를 제대로 써본 적도 없는 놈이 티켓값 아낀다고 경유하는 외항사를 탄다는 호기를 부렸으니 소심한 쫄보에게 긴장이 안된다는 것이 더 신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출발 전까지 '그냥 티켓을 취소하고 여행을 취소할까'라는 생각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대보다는 두려움을 안고 첫 유럽을 향해 출발했다.
티켓을 받고 비행기에 타고, 생각보다 외국항공사와 영어 안내에 적응해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나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2시간 30분 안에 경유 절차를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이 무색하게 카타르 도하공항에서는 무사히 경유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도하 공항의 상징 커다란 노란 곰돌이를 뒤로한 채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싣을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미리 예약한 택시기사가 내 이름표를 들고 서 있었다. 비용은 엄청 들었지만 첫 유럽행에 스스로 대중교통을 타고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을 자신이 없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0분이 넘어가고 어색한 공기가 차오르는 차 안을 환기시키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로마 같은 유적들 그득한 오래된 도시에서 사는 기분이 어떠냐?'라고 물었다. 생각보다 건조한 답변이 돌아왔다.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그저 그렇다' 긴장한 내가 기사의 이탈리아 억양 가득한 영어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의외였다.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뿜 뿜 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라서 그랬으리라.
어설픈 웃음과 무미건조한 답을 주었던 택시기사는 알려준 주소지라는 곳에 덩그러니 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주택 입구에 써져있는 번지수와 구글맵을 번갈아보며 그리고 호스트인 카리나에게 메일 보내보며 두리번두리번 골목을 몇 차례 헤매고 있는데, 철문인지 나무문인지 모를 육중한 문 사이로 한 사람이 반갑게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카리나였다. 헤멜 줄 알았는데 잘 찾아왔다면서 그녀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카리나는 육중한 대문과 현관문 여는 법, 와이파이 비밀번호와 체크아웃 방법, 근처 슈퍼마켓을 알려주고는 떠났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보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로마에 온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것이 계속해서 생기기 시작했다. 당장 웰컴 드링크 와인은 있었지만 물 한 병 없었기에 물을 사러 슈퍼마켓을 찾아야 했고 저녁 끼니는 어떻게 때울지, 저녁이나 내일 아침은 어떻게 로마를 돌아다녀야 할지 알아봐야 했다. 갑자기 생존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그나마 나의 영어도 유창하다고 할 수 없는데) 이탈리아 한가운데 떨어져서 마실 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침착하게 카리나가 넘겨준 관광지도를 펼쳐 들고 구글 지도와 비교해 근처에 작은 슈퍼 같은 마켓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숙소를 나왔다. 복잡한 열쇠는 어찌나 잠그고 여는 것이 어렵던지,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출발 전 두세 번을 연습하고 나서야 물을 사러 출발했다. 어설픈 초보 여행자에게 로마는 그렇게 친절하게 웃음 지으며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적대적이거나 냉소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얼어버린 내 마음의 이미지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슈퍼에서 물을 사고 나오는 로마의 거리는 내가 꿈꾸던 바로 그 유럽이었다. 순간 물 하나 사러가는 생존게임도 벅차 하며 걱정하는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 낭만을 즐기기로 했다.
다음날부터 구글 맵을 따라서 도시를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관광지도와 구글맵을 비교해 큰길을 잡아두고 책에서만 보았던 그곳들을 한 번 만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선지라 갓 구운 빵 냄새가 가득한 빵집을 여럿 지나쳤다. 여유롭게 노천카페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빵집에서 아침을 위해서인지 빵을 사가는 사람들. 영원의 도시 위를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지나쳐서 판테온, 개선문, 콜로세움을 둘러보았다. 로마를 대표하는 관광지인만큼 어디든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테러의 위험 때문인지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경찰들이 꼭 있었고 그 와중에는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아티스트들도 있었다.
걷다 보니 어떻게 돌아다닐지,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에 대한 고민은 차근차근 해결되기 시작했다. 조금 발이 아프더라도 유럽을 다 느껴보겠다는 욕심은 구글맵 하나로 무식하게 걷기 시작하면서 해결되었고, 먹고사니즘도 길거리에 끌리는 식당이나 우연히 알게 된 현지 가이드의 추천 가게를 찾아 들어가 주문하면 탁탁 해결되었다. 걱정과 달리 나는 여행에서 잘 생존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피곤과 배고픔이 찾아왔다. 현지 가이드의 추천 식당인 L'orso 80를 찾아 파스타와 와인 한 잔을 시켰다. 식사 후 정신도 깰 겸 후식으로 티라미수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아, 참고로 여기서 시작된 나의 티라미수 사랑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요즘도 티라미수 잘하는 집이 있다고 하면 휴일에 그곳을 찾아가는 중이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산탄젤로 성을 따라서 테베레 강을 거닐었다. 생각보다 난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나온 타지, 처음 제대로 사용하는 언어, 처음 시작해보는 생존 게임. 처음이지만 서툴지만 물어보면서 조금씩 실수해가면서 로마에서 관광을 핑계 삼아 살아남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유럽에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조금 더 덜 관광객 티를 내면서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다는 허세 가득한 걸음으로 테베레 강가를 걷기 시작했다. 어설픈 그 모습을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가 '나 이제 어른이에요!'라고 말하는 학생 같아 귀엽게 보이곤 한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조금 더 홀로 설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복잡한 전월세 대출과 이자를 계산하고 몇 가지 보장이 되면서 얼마나 보험료를 내는 것이 이득인지 비교하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아직도 내 월급 빼고 모든 게 다 올라가는 것만 같은 현상에 대한 답은 아직 없다. 일단 당장 다음 달 돌아올 카드값과 저축, 생활비 사이의 균형재정을 잡는 것이 정부지출의 재정균형보다 나에겐 더 중요하다. 운동을 할 시간을 만들고, 가끔의 일탈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고 통신비와 유류세를 계산하고 있다. 부족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꿈꾸면서 조급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채용사이트를 들낙거린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혼자 버티는 것, 홀로서기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아닐까. 결혼을 준비하며 스드메부터 혼수, 집을 알아보다 지친 친구의 한탄이 카톡을 넘어 들려온다. '어른이 되는 거 왜 이렇게 힘드냐' 거기에 '그러게'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으며 나도 같이 한숨 쉰다. 그러면서 로마에서의 추억을 다시 한번 꺼내본다. 낯선 곳에서 차근차근 실수하면서, 버티는 것. 그렇게 걷다 보면 나름 허세 가득한 모습이지만 현지인 인척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주기 시작한 그곳의 추억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나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그 세상의 낭만을 즐겨보기로 오늘도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때의 교훈(?)으로 나는 오늘도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에게 어른이 되는 레시피를 살짝 맛보기 시작하게 해 준 로마를, 그리고 유럽을 추억하는 이야기를 적어가 보려고 한다.
그렇게 로마에서 나는 어른이 되는 첫걸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