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옥중수상록, 새로운 백년의 문턱에 서서》를 읽고 4
■ 능력주의에 관하여 – 개천은 더 이상 용의 홈타운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준비했던 사법시험을 낙방하고 방황할 때였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다가 공무원 시험으로 방향을 튼 여동생이 법원공무원 9급 공채시험을 응시해보라고 했다. 사법시험과 과목이 중복되고 한국사와 소송법 객관식만 단기간에 준비하면 합격가능성이 있다는 취지였다. 학원을 다닐 엄두가 안 나서 동생이 주는 자료를 중심으로 사법시험과 공무원시험을 병행해서 준비했다. 결과적으로 사법시험은 떨어졌고, 법원공무원 시험은 합격했다. 한국사와 소송법 점수가 예상대로 낮았지만 상대적으로 법학과목이 어렵게 출제된 덕분에 가까스로 합격한 것이다. 합격소식도 동생이 문자로 전해 주었으니 입구부터 출구까지 동생의 손에 이끌려 미로를 탈출한 셈이다.
►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몫을 차지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능력주의(Meritocracy)라고 부릅니다. (중략) 하지만 이건 두 가지의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는 정말로 같은 출발선에서 뛰어야 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의 달리기로 모두를 줄 세우는 건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옥중수상록, 154쪽)
법원공무원 합격이 오로지 내 능력 덕분이었을까. 동생이 당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의자 없는 공장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하루 열 시간 넘게 운전대를 잡으며 서른 넘은 아들을 뒷바라지 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가족의 도움과 친구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나는 주거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합격의 중심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도 훨씬 나중으로 미루었을 것이 틀림없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정말 옛말이 되었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 아니다. 1970년대, 1980년대 우리나라의 고도 성장기를 지나 1997년 말 IMF 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40대 이하의 청년들은 건국 이래 최초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다. 공동체의 가치보다 ‘우선은 내가 살고 보자’는 각자도생의 관념이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능력주의’라는 간판을 이마에 붙이고 모든 결과는 자신이 노력한 결과이므로 그 열매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반면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나쁜 결과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굴욕감을 내재화한다. 문제는 이렇게 쌓인 사람들의 울분이 포퓰리즘의 바람과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비대졸 백인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당선되었고 영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 계층이 브렉시트 찬성에 몰표를 던졌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중국 우한 지방을 비롯한 외국인에 대한 혐오, 의과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같은 과 여학생을 성폭행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의대생은 앞으로 사회에서 공익을 담당할 주체이므로 사회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보라. 능력주의는 이미 몸속 곳곳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다.
아무리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해도 결과가 인간의 존엄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수 없는 형태라면 이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능력주의는 분배와는 다른 평면의 문제다. 능력주의는 오히려 불평등을 전제한다. 누구에게나 보장된 기회를 이용해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적 이동가능성(social mobility)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천장까지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이다. 능력주의가 몰고 가는 재앙의 터널을 어떻게 뚫고 지나갈 수 있을까.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을 넘어 어울림, 사회적 연대에 바탕을 둔 실질적 평등과 실질적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 물론 저항을 각오하고 혁명 수준의 개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암흑의 터널이라도 나와 함께할 곁이 있고, 터널 끝에 빛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