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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a Jan 19. 2024

이해

 나는 한국사를 따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캐드, 기사 두 개, 산업기사 한 개, 오픽 그밖에 잡다한 자격증도 있지만 한국사는 없었다.

예전에 쳐 본 기억은 있는데 보나마다 망한 게 뻔해서 시험점수가 나오는 날부터 지금까지 내 성적을 찾아보지 않았다.

구석기시대부터 열심히 공부하지만 금세 그 흐름을 외우다 보면 못하겠다고 포기했었다.

이번에는 한국사를 따서 공공기관에 도전해 볼 셈이다.

오랜만에 갖는 목표라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간간히 구청에서 하는 계약직 알바에 지원하기도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해서 더 걱정이 된다.




우리 집 주차장에 종이박스를 뒀는데 날씨가 추운 탓일까 고양이가 앉아서 쉬고 있었다.

물론 나를 보자마자 도망가긴 했지만 내 하루의 귀여움 지수가 확 채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렇게 귀여운 고양이도 자유로워 보이지만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다는 게 내 인생은 어디 호락호락 

하겠냐는 생각도 들어 막막하기도 하다.




한국사 인강을 만족스럽게 듣고 쉬는 김에 책을 읽고 있는데, 영숙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사실 언니는 아니고 할머니뻘이지만 주방에서 만난 모든 이를 언니라 칭하기에 언니라고 하겠다.)

언니가 내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항상 어딘가에서 혼나기만 했지 누군가 보살펴준 적 없는 사회생활에서, 

아니 보살핌 당하는 게 이상한 사회생활에서,

나를 생각해 주신다는 게 내가 식당에서 가사일이 천직인가 싶은 착각도 들었다.

언니한테는 한국사 준비는 한다고 하지 않았다.

괜히 나중에 결과가 우스울까 봐 그냥 쉬고 있다고 했다.

 



읽고 있던 책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계속 견뎌낸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아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전혀 좋아하지 않는 무언가에 매달려 오늘을 살아낸다.


뭔가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심정으로 회사를 뛰쳐나와 남들이 보면 펑펑 놀고 있는 이 시기에,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 할 나이에, 이렇게 있다는 것을 죄책감 덜어주는 용도로 충분했다.


사실 이 책도 날 괴롭혔던 직장상사가 '멘토의 날'을 맞이해서 준 자기 계발서였다.

물론 사비가 아닌 회사에서 지원해 준 돈으로 준 것이었고, 책 맨 앞장에는 '***매니저의 '이기는 삶'을 응원합니다.'라고 자필로 적어놓았다.

한창 괴롭힘으로 공황을 얻고 나서 휴직기간 때는 이 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운 그 사람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장담하며 본인이 산 것 마냥 준 이 책도 너무 미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니까, 왠지 그냥 나와 그 사람 모두 서툴러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용서'는 내 선에서 너무 큰 자비고, 그냥 '이해'하는 걸로 내 감정이 마무리 짓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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