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올해 칠십 하나인 나는, 작년부터 인연을 맺은 “디지털배움터“ 덕분에, 지금은 ”업글할매“라는 닉네임으로 나름 소소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디지털 배움터랑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새 일 년 사 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작년 6월 초에, 인터넷에 뜬 디지털 배움터라는 곳을 알게 되고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미국에서의 오랜 이민 생활을 접고,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내 나라로, 거꾸로 역이민을 온 지도 어느덧 8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에서의 이민생활도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한 채, 언젠가는 내 나라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디지털배움터”같은 곳이 전국에 깔려있어서, 내가 배우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에서도 다양한 커뮤니티와 수많은 센터들이 있지만, 완전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말 다르고 문화가 완전히 다른 미국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부는,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이질감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내 나라, 내 조국에서의 배움은 달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같은 모습을 한 사람끼리, 옆에서 아무리 작게 이야기해도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모국어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친밀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돌아오니까, 사방 천지에 ‘디지털포메이션“이라는 단어가 유행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디지털포메이션”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나역시 디지털 세계에 한발 내딛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있었지만, 온 세계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바람에, 그저 혼자서 조용히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칠십 하나인 나는 소위 말하는 컴맹 세대이다.
이런 사람이 감히 “디지털포메이션”을 외치고 있으니, 우리 집 양반 표현에 의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 판이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기가, 한번 시작했다 하면 또 죽기 살기로 해댄다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말도 있지만, 까짓것 쫓아다니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면 다행히 바느질은 할 줄 아니까, 꿰매고 또 꿰매서라도 황새 꽁무니를 놓지 말자는 심정으로 참으로 열심히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컴맹 세대라서 그런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IT에 대한 소개를 해주는, 소위 잘나가는 유튜버들의 방송을 듣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을 때는, 괜히 죄 없는 유튜버 선생님들을 혼자서 째려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오고,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정말 나름대로 무척이나 심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처럼, 이해를 못 하더라도 그냥 틀어놓고 음악 듣듯이 해보자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들었더니, 세상에나, 정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어려웠던 디지털 단어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남편의 잔소리가 너무 힘들어서 이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어느 날 정말로 음악처럼 들리게 됐던 그때의 신기한 체험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지 잘난 디지털포메이션이라고 하더라도, 열심히 나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 앞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나 보다.
이렇게 서서히 디지털과 조금씩 친해질 무렵에 “디지털배움터”라는 은인을 만난 것이다.
그 힘들고 어두웠던 코로나를 견디고 일어나서,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그야말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공부할 수 있다는 감사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원해 준단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라는 약간 서글픈 속담도 있지만, 공짜 아니라 비싼 돈을 지불해서라도 이런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 하는 상황인데, 게다가 공짜라는 소리에 만사 제쳐놓고 신청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신청하는 것조차도 많이 힘들었다.
이런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할매였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헤매다가 간신히 등록을 하고는 대망의 강의 첫날을 얼마나 흥분되고 떨리는 심정으로 기다렸는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진다.
나의 첫 “디지틸배움터”강의는, “제주 꿈바당 어린이 도서관”내에 있는 북카페 건물에서 시작이 됐다.
거의 평생을 늘 일찍 다니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이날도 여전히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서는, 북카페에서 혼자 커피 한 잔 시켜놓고는 착한 학생답게 수업 준비를 했다.
나라에서 공짜로 가르쳐 주는 곳이라길래, 난 처음에는 나 같은 시니어들만 오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첫 수업을 하는 교실에 들어갔더니, 세상에나, 나 빼고는 전부 40대 초반이거나, 이제 막 오십을 넘긴 두 분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그 당시 칠십이었던 내가 최고령자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도 어색해서 잘못 왔나 싶었다.
괜히 젊은 사람들 공부하는데, 나 같은 할매가 행여 민폐 끼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두 시간에 걸친 첫 강의가 끝나갈 무렵이 되니까, 어느새 서서히 알듯 모를 듯 친밀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면 강의의 매력인 것 같다.
강사님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보고 들을 수도 있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유튜브하고는 다르게 바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옆에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아무리 “인강‘이라는 것이 유행을 한다지만, 컴멩세대인 나한테는 뭐니 뭐니 해도 이런 대면 강의가 훨씬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운 것 같다.
내 생애 처음 시작하는 ”디지털배움터“에서의 강사님은 ”라이팅시온“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40대 초반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강사님이었다.
그리고 “서포터즈”라는 낯선 이름의 아주 젊고 예쁜 선생님도 함께 했다.
”나다운 블로그 키우기“라는 어마어마한 주제로 ”디지털배움터“의 가슴 떨린 첫 강의가 시작이 되었다.
이때까지는 막연히 블로그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다.
비로소 어떻게 운영을 하는지, 어떻게 꾸미고 나가는지,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나다운 블로그“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강의가 시작된 것이다.
완전 초보자 입장에서 바라본 강사님들은 마치 딴 세상의 사람들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저런 날이 찾아오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디지털배움터“에 발을 들여놓기를 참 잘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블로그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었다.
작년 6월 17일에 떨리는 마음으로 블로그에 첫 포스팅을 올려놓고는 그때부터 무려 7개월이라는 기간을 하루도 안 빠지고 “1일 1포스팅”을 한 것이다.
글이라고는 일기장에 아무 생각 없이 몇 줄 적어 내려간 것이 전부였는데, 책에 대한 리뷰를 쓰고,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글쓰기 능력이 향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작년 12월 11일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브런치”작가라는 타이틀도 거머쥐는 영광또한 안게 된 것이다.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기뻤던지 심장이 너무 뛰는 바람에 하마터면 응급실로 실려 갈 뻔했다.
어쨌거나 내가 칠십이라는 나이에 블로그를 시작하고 브런치 작가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디지털배움터”를 만났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칭호를 얻게 되면서 얻게 된 또 하나의 기적은, 바로 우리 집 양반의 나를 향한 눈꼬리가 다소 부드러워졌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다 늙어서 무슨 공부냐면서 눈초리가 사납더니, 이제는 누구나 인정해 주는 작가가 됐다는 나만의 설명에 호랑이 남편님의 눈매가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자기 딴에도 늘 모자란 것 같았던 마누라가 뭔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이 모든 것이 다 “디지털배움터”랑 “라이팅시온”강사님을 만난 덕분이라는 생각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등록했던 블로그 팀은 “나다운 블로그 키우기 3기”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팀의 대부분이 같은 뜻,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서 한 달로 예정돼있던 강의가 끝나자, 너무도 아쉬운 마음에 계속해서 강의를 이어가 달라고 강사님한테 통사정을 해서 꽤 오랫동안 그 모임이 이어져 나갔다.
블로그 공부가 끝나면, 인스타그램 공부도 하고, 좀 더 잘 꾸미기 위해 “미리캔버스”랑 “캔바”라는 이미지 툴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나한테 맞는 이미지를 찾아서 적절한 곳에 같이 쓰기도 하면서, 모두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각자의 SNS 페이지를 들여다보면서 서로 서로 감탄하고 칭찬해 주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다운 블로그”가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 같은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비록 가족은 아니지만, 어떨 때는 가족보다도 소중하다는 느낌 또한 든다.
그 옛날 셰익스피어가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피는 통해도, 마음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단다.
“디지털배움터”에서 만난 사람들이 비록 피를 나는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마음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
“디지털배움터”의 동기들의 처음 모습을 떠올려본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과 일 년이 조금 지난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엄청난 변화와 성장들을 한 것이다.
날로 달로 번창한다는 뜻의 ”일취월장“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우리 블로그팀을 들여다보면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것이다.
바로 ”라이팅시온“ 강사님과 그 강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묵묵히 함께 성장해온 착한 제자들과의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병원에 가서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도 하늘이 주신 복인 것처럼, 공부하러 다니면서 마음이 따뜻한 좋은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인 것 같다.
올해도 여전히 새로 시작되는 ”디지털배움터“강의에 그때 그 시절의 반가운 모습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일 년 전에 시작했을 당시의 황당했던 모습과 너무도 아름답게 성장한 지금의 변화된 자기의 모습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못 만나더라도, 그때의 좋았던 추억들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날이면, 마치 헤어진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가움에 절로 얼굴들이 환해진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예쁜 모습들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이기에, 행여 누가 훔쳐 갈까 봐 두려워서, 보따리에 꽁꽁 싸서 숨겨놓고 싶을 정도이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디지털배움터“와의 만남으로 인해, 앞으로의 내 노후의 삶은 완전히 바뀔 것 같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꽤 유식한 말인 “인풋 + 아웃풋”이라는 것을 제대로 경험한 것이다.
그동안은 혼자서 부지런히 아이패드에 저장만 했던 것은 “인풋”이었고, 부족하지만 용기를 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아웃풋”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디지털배움터“를 통해, 그동안 알게 모르게 꽤나 유식해졌다.
이래서 인생은 계속해서 살만한 것이다.
늘 새롭게 도전해 볼 수 있는 공부가 항상 지척에 있다는 사실만 잊지 않고 산다면 100세 인생도 도전해 볼 만하다.
”디지털배움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