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의 억만장자 팀 거너는 올해 9월 열린 한 경제포럼에서 최근 급상승하고 있는 실업률에 대해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최근 실업률의 증가로 인해) 고용시장의 거만함이 꺾이기 시작했고, 그 추세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코로나경제를 기점으로 직원들은 일을 하기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 많이 받고 적게 일하고 싶어하는 소상공인들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되었습니다. (...) 실업률은 계속 증가해야 합니다. 40-50% 증가해야 합니다. (...) 언젠가부터 고용주가 자기 직원들에게 감사해야하는 태도가 당연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은 어디까지나 고용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고, 그 반대가 아님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면 경제적인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나라의 자산가들과 경영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동산타이쿤이 한 소신발언은 급속도로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퍼졌고 놀랍지 않게도 다수대중의 분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거너는 발언시점 이후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의 대답은 왜 문제가 됐을까? 첫째로, 실업률의 증가와 물가상승에 가장 강한 타격을 받는 계층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말을 한 사람이 경제의 고통을 직접 느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민주당 의원 오카시오-코테스는 CEO 대비 종업원의 평균연봉격차가 그 어느때보다 크게 기록된 것을 꼬집었고 영국노동당 의원 제롬 랙설은 거너의 발언이 2023년 경영인보다는 만화 속 악당이 할법한 말이라고 비웃었다.
또 다른 의문은 "그의 대답이 왜 이제서야 문제가 됐을까?"이다. 기업의 존재조건은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고용에 있어서도 직원에게 주는 돈보다 더 많은 결과를 뽑아내야 한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용을 뽑아내겠다는 목적의식은 주식회사와 근대시장경제가 시작된 시점인 16세기 이래로 변한적이 없으며, 미디어에 급속도로 퍼져 밈이 되어버린 억만장자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이들은 평소에도 비슷한 취지의 생각과 이야기를 공석과 사석에서 수도 없이 주고 받아왔을 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물리적인 여건(업무시간 중 일 외의 다른 것을 볼 수 없는 환경 등)을 마련할 뿐 아니라 심리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어떻게 하면 일터에서 딴 생각을 하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구성원을 도태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에도 투자한다. 거너를 비롯한 많은 경영인과 투자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전부터 늘 들어왔던 이야기가 갑자기 이슈화가 된 데에 대해 다소 의아했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매일 가던 카페의 직원이 어느날 갑자기 당신의 말투를 문제삼아 그런 식으로 주문하면 커피를 타드릴 수가 없다고 대든다면, "여태까지 잘 해오다가 갑자기 왜..?"; "나 돈 냈는데..."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에는 아무도 일을 안할라고 그래" (nobody wants to work anymore)라는 문제의식은 우리나라보다 산업화역사가 긴 미국에서 19세기말 처음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이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1894년부터 시작해 1905년, 1916년, 1922년, 1937년, 1940년, 1952년, 1969년, 1981년, 1999년, 2006년, 2014년, 2022년에 쓰인 신문에서 모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요즘 사람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호주의 억만장자가 조준한, '최근들어 거만해진 직원들과 탐욕스런 소상공인들'의 역사는 무려 130년정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4년, 1969년, 2006년과 비교해 2023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건 불특정다수의 의견이 한 사람의 대답을 문제삼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문제없이 잘 넘어갔을 일들이 어느순간부터 금기시되었고, 아무런 문제없이 잘 넘어갔던 일들도 한참 지나서야 갑작스레 사회이슈가 되었다. 늘 해오던대로 자기 비서를 대했던 유명정치인들은 과거의 일로 민중재판을 받고 공직에서 사임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선배들이 해오던대로 흑인시민을 대했던 백인경찰은 살인혐의를 받고 죄수복을 입었다. 학교폭력으로 논란이 된 연예인들은 방송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실상 매체노출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각각 미투운동, BLM, 캔슬컬처의 성과로 받아들여지는 세 사건은 기존에 으레 행해져 오던 관례를 오답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어진 답이 문제로서 제기될 때 유서 깊은 게임의 규칙은 근본적으로 바뀐다. 오랫동안 원칙처럼 받아들여져온 윤리를 강조한 CEO의 소신발언이 구설수에 오른 것은 130년 전통의 이 바닥 질서가 오늘날 새롭게 개편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흐름을 고려하면 당장 정답처럼 으레 행해지고 있는 관례들이 언제든 오답으로 규정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종업원의 불친절을 문제삼아 불만을 토로하는 고객, 직원의 불성실함을 지적하는 직장상사, 아이의 미래라는 명목아래 수단을 가리지 않고 특목고, 명문대 입학을 시키고 싶은 학부모 등은 마치 천지가 개벽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어온 불변의 섭리처럼 별도의 합리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접객에서의 서비스정신, 일터에서의 성실한 태도, 중고등학생이 방과 후에 영어 수학학원을 다니고 밤 10시가 되어서 귀가하는 것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주어진 사회문제들에 대한 보편적 모범답안들이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정답들은 시대의 정서가 변함에 따라서, 또 매체의 발달과 함께 언제든지 문제로서 재조명될 가능성을 시한폭탄처럼 안고 있다. 과거 미국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상당수가 14세 이하의 아이들이었고 하루 16시간 이상의 노동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을 미뤄보면 오늘날 관례처럼 행해지는 방과후 사교육 역시 훗날 아동에 대한 가혹행위로 규정될 수도 있다.
명료한 답은 곧 잠재적 문제이다. 쉬운 답은 많은 문제를 이미, 항상 초래하고 있다. 현존하는 비평가중 최고로 평가받는 슬라보이 지젝이 지적하듯,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와 과도한 쓰레기배출 등의 환경문제에 대해 재활용품 분리수거라는 대답을 하는 것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기보다는 당장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 골머리 썩히는 것을 회피하는 기능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수면 위로 떠오른 문제에 대해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들끼리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고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것이다. 상호작용(Interaction)의 반댓말로 상호수동(Interpassivity)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커튼 뒤에 감춰놓은 뜨거운 감자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시대상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주어진 답의 명료함 그 자체이다. 만약 당신이 속해있는 집단에서 문득 들었던 의문에 대해 누군가가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면 그 답은 누군가 토를 달기 전까지 불변의 진리처럼 굳어질 것이다. 그 답에 당장 토를 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적어도 그 대답의 명쾌함이 문제를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정도는 알고 넘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