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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나비 Nov 28. 2023

부모님의 폭력, 나는 파블로프의 개새끼가 되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간다는 것

아버지는 '감정 조절'에 미숙하셨고, 어머니는 '남의 시선'을 상당히 많이 신경 쓰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그 밑에서 20년 넘게 살아보니, 이건 최악의 조합이었다. 3살 무렵엔가 아니면 유치원생쯤 되었을까. 부모님께서 서로 언성을 높이시면서 다투셨고, 아버지께서 거실에 있던 탁상을 집어던지셨다. 탁상은 완전히 부서지진 않았지만, 선명한 금이 갔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다툼의 원인이 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자체가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었다. 그래서 내 방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린 것 같다. 그러자 부모님께서 내 방에 들어와서 달래주셨던 것 같은데, 그때 당시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분노'라는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셨다. 화가 나시면 언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고, 그 이후로도 물건이 날아다니거나 부서지는 것 정도는 종종 봤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나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는데, 좀 특이한 점이라면 흔히 어른들이 말하는 '착한 아이'에 나를 맞추려고 의도적으로 계산해서 노력했다는 것이다.'강아지를 사달라고 하지 않는 아이', '게임기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 아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 등등. 친구집에 놀러 가면 정말 재밌게 가지고 놀았지만, 단 한 번도 닌텐도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부모님께 조른 적은 없다. 그게 '착한 아이'였으니까. 나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잘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어머니는 다른 학부모님들로부터 부러움의 눈길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내게 전하실 때 좋아하셨다. 나는 '착한 아이'가 됨으로써 돌아오는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오른손의 살을 뜯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오른손 손가락 안쪽의 살을 뜯었는데, 손톱 쪽 거스러미를 뜯던 같은 반 친구에게 보여주며 '거기 뜯으면 피나고 아프지 않아? 손가락 안쪽은 뜯어도 안 아파!'라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오른손 검지손가락만 제외하고 엄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의 시작부터 끝까지 살을 뜯고, 재생돼서 살이 차오르면 다시 또 뜯고의 끊임없는 반복이었던 습관은 20살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23살인 지금도 오른손과 왼손의 손가락 안쪽 살을 비교해 보면 미묘하게 생김새가 다르다. 주로 공부를 할 때나 불편한 스트레스 상황일 때 항상 손을 뜯었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내게 '나중에 남자친구 생겨서 손잡았는데 여자 손이 이게 뭐야? 이러면 어쩌려고?'라는 식으로 손을 그만 뜯으라고 하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불안'을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한창 자아를 만들어 갈 청소년기에 생겨버렸다. 중학교 1학년 때일 것이다. 학교 가기 전에 돌돌 말린 잡지로 아버지께 일방적으로 맞았다. 주로 다리 쪽을 많이 맞았다. 사실 이 정도도 가정 내에서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술 할 '사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배드민턴 채로 꽤 심하게 아버지께 맞은 기억이 있다.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배드민턴 채를 팔로 어떻게든 막아보느라 양팔 안쪽이 시퍼렇게 핏줄이 다 터져서 심하게 멍으로 물들었다. 압력이 집중되기에 배드민턴 채의 옆날만 한 것이 또 없을 것이다. 맞아봐서 안다. 등에는 채찍자국처럼 여러 군데가 멍들어 부풀어서 학교 가려고 가방을 멨을 때 많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시는 분이셨고, 항상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밖에다 얘기하면 그것이 곧 내 흠이 되어 돌아온다고 교육하셨다. 어릴 때부터 줄곧 한결같이. 이 정도 '사건'이면 학교를 안 갔을 법도 한데,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제시간에 맞춰 학교에 갔다. 나는 전교권 성적의 모범생이었으니까. 학교에 가서 교복 춘추복 소매를 걷어 친구들에게 심하게 멍든 걸 보여주면서 '넘어져서 벽돌에 찍혔다'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내비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고, 아무도 보듬어줄 수 없는 나의 상처를. 그렇게라도 말이다.


폭력적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별다른 사과나 상황을 짚고 넘어가는 것 등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그 일'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세뇌 교육'을 충실히 따랐다. 중학교 시절 나의 취미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었는데, 나의 심신에 큰 상처를 입힌 도구였던 '바로 그 배드민턴채'로 '사건' 이후로도 계속 배드민턴을 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중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기에 각 중학교에서 내신 성적이 높은 아이들이 모이는 사립 기숙사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공부를 하는 이유가 나의 꿈과 목표 때문이 아닌 오직 '남의 시선'이었던 나는 경쟁이 치열하고 높은 수준의 학업 성취가 필요했던 학교에서 삶의 이유를 잃어버렸다. 삶의 이유를 잃어버렸는데 성적이 좋았을 리가 만무하다. 그로 인해 알아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중학교 때까지는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학업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유독 어머니와 나 사이에 집 안에서 갈등상황이 생기면 그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하셨다. 언성을 높여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입을 닫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1주일의 기숙사 생활 후 집에 돌아왔던 여느 주말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아버지를 어머니는 그렇게 또다시 막아주지 못하셨다. 하얀 수건이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져서 내 얼굴을 가격했다. 쓰고 있던 안경은 저편으로 내동댕이쳐지며 날아갔다. 여러 차례 가격된 코에서는 코피가 터져 연두색이었던 내 방 벽지에 흩뿌려졌고 흰 수건은 그새 빨갛게 물감이 터진 것처럼 물들었다. 초록색과 빨간색은 보색이라 대비가 강하게 느껴진다지? 그날 벽지에 흩뿌려지던 핏방울의 선명한 영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입술 역시 그새 터져서 부어올랐고, 눈가에도 멍이 들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인 폭력을 경험해도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 몸 부위였다. 얼굴을 맞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얼굴은 중학교 때 춘추복으로 가려진 피멍으로 물든 팔과 달리 숨길 수가 없었다.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는데 원래대로라면 입에 머금어져야 할 양칫물이 입꼬리를 따라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어올라서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질질 샜으니까. 헹굴 때 역시 정면을 보고 가글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양치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했다. 친구들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괜찮은 거야?'하고 물어보면 난 애써 웃음 지으며 '응, 실수로 넘어졌어'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맞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나는 있다.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경험한 이후로는 가족 갈등 상황에서 아버지의 언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시거나 위협하는 언행을 보이시면 그 대상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냥 눈물이 흘렀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새끼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가 싫었다. 그까짓 게 뭐라고 눈물을 보이는 내가, 그런 내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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