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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Nov 01. 2024

폐 끼치지 말라고, 패키지여행

후라노 팜 도미타

여름을 좋아한다. 겨울에 동남아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겨울은 좀 짧아지고 여름을 더 살아서 이득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데 올해 여름은 시작도 빠르고 너무 뜨거웠다. 여행은 가고 싶다면서 비행시간이 긴 유럽도 싫고 동남아는 뜨거워서 싫다며 까탈스럽게 구는 남편 때문에 여행지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라도 가고 싶어 하던 중 우연히 광고에서 보랏빛의 매혹적인 라벤더 농장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홋카이도는 눈 보러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꽃 보러도 가는 곳이었다. 게다가 제주보다 시원하다. 마침 상담 예약 남겼던 패키지상품은 할인까지 했다. 이건 가라는 신호였다.    

  

아침부터 제주공항, 김포공항, 인천공항을 거쳐 치토세 공항까지 이동하는데 하루를 다 쓰고 다음 날 가는 라벤더 농장은 첫 일정이나 마찬가지였다(전날 밤, 삿포로 시내를 아주 잠깐 구경했다). 호텔에서 도미타 농장이 있는 후라노까지는 버스로 세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내가 사는 제주에서는 차를 타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이라 버스로 세 시간을 계속 간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다. 7월 중순이었고 가이드의 말로는 이때 라벤더가 절정이라 일본인들이 너무 많이 와서 차가 심하게 밀린다고 했다. 차가 덜 밀리는 시간에 가기 위해 7시 반에 출발했다. 


후라노가 가까워지자 마을의 집 앞에 작은 라벤더 꽃밭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차도 별로 안 밀리고 잘 왔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제 시작이었다. 세 시간 예정이었던 길이 세 시간 반이 되었는데도 도착을 못 하고 눈앞에 보이는 차량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10시 반 도착 예정이었는데 11시가 되었고, 가이드는 초조해하며 말했다. "원래 도미타 농장에서 자유시간을 한 시간 드리려 했는데 시간이 지연돼서 많이 못 드리겠네요. 점심 식사를 예약해 놔서 조금만 구경하고 빨리 차로 돌아와야겠어요." 나는 라벤더 농장에서 여유 있게 놀고 싶었다. 엄청나게 맛있다는 주황색 멜론도 먹고 꽃 보며 커피도 마시고 싶었다. 제주에서도 남편이 맨날 빨리 가자고 하는데 일본까지 와서 가이드가 또 그러니 나도 모르게 심술이 났다. "아직 내리지도 않았는데, 빨리 돌아오라고?" 혼잣말을 들은 옆자리 아줌마가 맞다며 웃어줘서 마음이 좀 풀렸다.


겨우 도착한 농장의 한 매점 앞에서 가이드는 아이스크림 쿠폰을 나눠 주며 40분 후에 만나자고 했다. 얼마나 넓은지 우리가 있던 매점을 중심으로 왼쪽도 오른쪽도 길 건너로도 모두 꽃밭이었다. 다 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럴 때 어느 한 곳에서만 즐기면 좋은데 꼭 안 가본데 가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고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 농장은 소유주가 한 명이라 농장의 어느 매점에서도 아이스크림 쿠폰을 쓸 수 있다는 설명까지 듣고 나니 30여 분밖에 안 남아 속상했다. 좀 유연하게 시간을 배분하면 좋을 텐데 싶었다.


위로 올라가니 끝없이 내려다보이는 보랏빛의 라벤더가 정말 예쁘기는 했다. 군데군데 빨간 꽃 노란 꽃도 함께 조화롭게 피어 있었다. 꽃밭 사잇길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우리는 마음이 급해 꽃밭 속으로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빨리 다른 꽃밭도 가 보고 싶어 대충 보고 쿠폰을 쓰려고 보니 줄이 길었다. 다들 콘을 들고 있었는데 우리 차례가 되니 그림을 보여주며 콘으로 할 건지 컵으로 할 건지 물었다. 콘으로 주라고 그림을 가리켰는데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콘을 가리키다가 앞에 있던 사람들이 그림을 보며 동전을 하나씩 내고 아이스크림을 받아 가던 게 생각났다. 콘을 먹으려면 50엔을 더 내라는 것이다. 전날 밤에 와서 편의점에서는 카드를 썼던 우리는 동전이 없어 컵으로 받았다. 홋카이도는 유제품이 특별히 맛있고, 이곳의 라벤더를 사용한 특별한 아이스크림이라는데 기분 때문인지 그냥 라벤더 향이 나는 보라색 아이스크림이었다. 


"반대쪽 꽃밭도 가 보자. 멜론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멜론 맛도 보고 싶어" 다 보고 다 먹어봐야 한다. 길을 건너니 또 다른 느낌의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삼십 분 남짓 자유시간을 쪼개서 남편은 담배도 피우려 했고 미안한 표정으로 기념품가게를 구경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라벤더 비누며 차, 가공식품들을 구경하다 주황색 멜론을 발견했다. 못 먹어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너무 반가웠다. 한 조각에 600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주황색의 탐스러운 멜론은 남편의 눈을 커지게 할 정도로 정말 달고 맛있었다. 


시간에 딱 맞게 겨우 약속 장소로 갔는데 한 팀이 안 와 있었다. 네 명 여성 팀인데 전날 호텔 로비에서도 가이드 말을 안 듣고 기념품 가게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고르며 성가시게 했던 팀이다. 기다리다가 마음이 급해진 가이드가 찾으러 나갔다. 그녀들은 알뜰하게 로밍도 안 하고 와서 통화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다들 순한 사람들인지 작은 소리로 자기 일행들끼리 수군댔다. 남편도 덩달아 구시렁댔다. "그러지 마, 여행하다 보면 우리도 어떤 상황이 될지 몰라." 남편에게 말하고 조용히 기다렸지만, 맘이 편하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컷 구경하고 기다리는 거였으면 덜 화났을 텐데, 네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가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출발도 못 하는 상황이 화를 돋운 것이다. 여름의 홋카이도 여행은 라벤더가 메인인데 말이다. 슬슬 무리에서 이탈하고 가까운 꽃밭에서 사진 찍는 이들이 생겼다. 나도 꽃밭으로 가서 좀 더 놀다 왔는데 시간이 제법 지나도 그녀들이 오지 않았다. 다리도 아팠다. 나 먼저 앉고 남편에게 벤치를 가리켰다. "안 앉을래." "왜? 다리 안 아파?" "앉아 있으면 화 안 난 거 같잖아." 초딩같은 남편의 대답이 나를 웃게 만든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충분히 화내고 있어. 너까지 안 보태도 돼." “그렇겠지” 또 금방 꼬리를 내리며 웃는 모습이 귀여운 오십 살 아저씨다.


한참 뒤 가이드가 여성팀을 데리고 왔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 있었고 버스 안은 썰렁했다. 가이드는 모두 이해해 줘서 감사하다고 했고, 아주머니 중 한 명이 정말 죄송하다며 인사를 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뭐라고 대답하냔 말이다. 나 혼자라면 괜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화가 난 모두를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점심 예약 시간을 늦추려고 전화했더니 음식을 다 차려놔서 변경이 안 된다며 식은 국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고 그 와중에 가이드는 국이 식는 것까지 걱정해야 했다. 그렇게 조용히 식사 장소로 한 시간을 또 이동했다. 첫날 가이드가 '패키지'를 여러 번 말해 보라며 "패키지, 패키지..... 네, 폐 끼치지 말라는 뜻입니다"라고 했었다. 어쩔 줄 모르고 눈치를 보는 그녀들도 안쓰러웠다.  

     

*팜 도미타에서는 주황색 멜론 꼭 먹어보자. 현금만 가능하니 현금 꼭 챙겨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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