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이 아오이이케 (푸른연못)
"차라리 걸어가요. 가이드님." 일행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밤에는 쌀쌀하다는 말을 들었고 에어컨을 틀어 놓으면 차 안에서 추울까 봐 약간 두터운 가디건도 챙겨갔다. 홋카이도 비에노의 기온은 26도 정도였고 에어컨을 최대로 틀었다고는 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났다. 다들 그 전 코스에서 밀리는 차와 작은 사건으로 이미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밀리는 차 대부분은 일본인들의 자가용이었고 관광버스는 몇 대 없었는데 일본의 자동차들은 놀랍도록 질서를 잘 지켰다. 갓길에 대충 세워둔 차는 없었고 가득 찬 주차장에서 한대가 나오면 도로에서 기다리던 한대가 들어가는 식이었다.
불만이 많아지니 가이드가 마지못해 최대한 가까이 가서 내리자고 했다. 바깥은 오히려 버스보다 시원했다. 이끼가 올라온 숲길을 걸었다. 한국처럼 덥지는 않았지만, 햇볕이 뜨거웠다. 비쩍 마른 가이드가 앞장섰고 우리는 학생들처럼 둘씩 셋씩 이야기하며 그 뒤를 따랐다. 어릴 적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소풍 가던 때가 생각났다. 얼마나 가야 하는지 모르는 길을 가려니 마음이 옹졸해지며 불만이 생겼다. 말은 안 했지만, 모두의 얼굴에 화가 묻어 있었다. 한참을 걸으니 저 앞에 안내판이 보였다. 표정들이 약간 밝아졌다.
평소에는 관광버스 몇 대만 오는 곳인데 연휴랑 겹쳐서 일본인들이 많이 와서 차가 밀린다고 했다. 주차장을 지나 푸른 연못까지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늘도 없었고 이미 많이 걸은 터라 더 힘들게 느껴졌다. 구경하고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의 손에 불량식품처럼 보이는 아주 파란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이곳의 특색을 살린 아이스크림인가 보다' 생각하며 봤더니 줄이 어마어마했다. “이 땡볕에 아이스크림 하나 먹겠다고 저렇게 줄을 섰다고?” 그들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아오이이케(푸른연못)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그렇게 고생하며 간 곳이 어떤지 궁금했다. “별로이기만 해봐라.”씩씩거리며 갔다. 사실 '연못이 멋있으면 얼마나 멋있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아오이이케 호수의 물은 시로카네 온천의 알루미늄 성분과 비에이 강의 물이 섞이면서 콜로이드 형태의 입자가 생성되고 그것이 햇빛을 산란시켜 파랗게 보인다는 설명을 들을 때는 눈만 멀뚱거렸는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연못을 본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푸른 빛을 띠는 고요한 연못에 하늘도 나무도 구름도 가만히 머무르고 있었다. 푸른 물속에 죽은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었다. 그저 넋 놓고 한참을 보았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서 있던 곳 주변이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이라며 사진 찍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고 나고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계속되었지만, 저 앞은 다른 세계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쪽의 시간이 멈추고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해졌다.
아름다운 연못을 보며 키 큰 나무 사이로 난 길을 홀린 듯이 계속 걸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거의 없고 연못 주변은 더 한가로웠다. 갑자기 앞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뒤를 돌았는데 남편도 안 보였다. 겁이 나서 전화했더니 어디까지 갔냐며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남편도 당황했단다. 나는 항상 그렇듯 남편이 뒤에서 보고 있다가 따라오는 줄 알았다. 내가 넋 놓고 있었던데 반해 남편은 흥미를 빨리 잃은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당연한 듯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들어갈 때보다는 좀 짧아진 줄을 섰다. 갈 때는 줄 선 사람들더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 놓고는 말이다. 푸른 연못을 형상화한 디저트도 음료도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밀크 맛과 파란 맛 반반 아이스크림과 밀크 반 소다 반이 들어 있는 음료를 사고 만족해서 젊은 친구들을 따라 가게 앞에서 인증사진도 찍었다. 남편이 많이 민망해했다.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놀랍게도 눈이 커지도록 맛있었다. 인생 아이스크림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북해도는 유제품이 특별히 더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이해됐다. 주차장에는 기사님이 차를 잘 대고 있었고 에어컨을 켠 버스는 여전히 더웠지만 마음은 한결 시원해져 있었다.
가이드가 걸어갈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고생 많이 했다고 말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놀러 온 사람들에게 일하러 온 사람이 고생했다는 말을 하는 게 좀 이상하게 들렸다. 고생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다 같이 했고 그건 가이드의 잘못은 아니었다. 웃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무섭게 생긴 가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말할 때 '어'와 '예'를 앞뒤로 붙이는 습관이 있는 가이드의 말은 거의 집중이 안 됐지만, 이번엔 저절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 사실 아까 곰 나올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예
어, 걷다 보니 곰 배설물 같은 구린 냄새도 나고, 예
어, 제발 곰만 나오지 말라고 빌었어요, 정말 모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섭게 생겼지만, 비쩍 마른 연약한 가이드 한 명 믿고 철없는 아이들처럼 따라갔던 것이다. 첫날 가이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홋카이도는 넓은 땅 중 20% 정도만 개척된 땅이라 사람보다 동물보기가 더 쉽다고 했다. 가끔 너구리도 볼 수 있고 사슴도 여우도 볼 수 있는데 곰이 나오면 큰일이니 모두 곰이 나오지 않기를 빌자고 했다. 곰이 나타나면 죽은 척하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랬다간 정말 죽는단다. 그 지방 사람들은 방울을 들고 다니다가 곰이 나오면 방울 소리를 낸다고 했다. "매점에도 방울을 팔아요"라고 해서 '기념으로 사 갈까' 생각하는데 "그걸 쓸 일도 없는데 사고 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왜 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해서 혼자 생각하고 혼자 민망해했다.
곰이 그렇게 무서운 동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누구나 갖고 노는 친숙한 곰돌이 인형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무서운데 곰 인형은 왜 그렇게 귀엽게 만드는 걸까? 시커먼 몸에 입을 벌리고 시뻘건 속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화내는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어쩌면 너무 무서워서 귀엽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북해도는 겨울과 여름, 성수기가 두 번으로 겨울에 눈이 정말 아름답지만, 여름엔 라벤더가 있고 푸른 연못도 한여름이 가장 예쁘다고 했다. 겨울에는 연못 위에 하얗게 쌓인 눈밖에 볼 수 없다고 하니 다 좋을 수도 다 나쁠 수도 없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한여름의 푸른연못을 봤으니 고생도 그만큼 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