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조국 일식 과학 유람기 #13 - 애플 비전프로 체험
고백하자면 저는 애플빠, 인터넷에서 폄하해서 부르는 말로 앱등이입니다. 아이폰3GS가 첫 발매될 때 광화문 KT에서 첫날 구매해서 회사에서 첫 아이폰 사용자가 되는 등 지금까지 사용한 아이폰만 10종류입니다. 아이패드, 맥북, 에어팟 등을 합치면 꽤 많은 기기를 계속 사용 중이죠. 그런데 작년 가을에 발매한 비전프로(Vision Pro)는 미국에만 판매하는 데다 가격도 너무 비싸서 실물조차 볼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VR 기기인데 Spatial Computing(공간 컴퓨팅)이라고 애플 특유의 용어를 만들어서 정의했습니다. 그냥 게임하고 영화 보는 일반적인 VR 기기가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공간 전체가 컴퓨터가 된다는 뜻인데요. 테크 유튜버들이 미국에 가거나 직구를 해서 사용해 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만 볼 수 있었습니다. 직접 착용하는 형태라 영상을 봐도 정확한 느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뉴욕을 방문하면 꼭 해봐야지 했던 것이 비전프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편에서 뉴욕 자유여행을 위한 단톡방을 통해 여러 일정을 서로 제안하고 참가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저처럼 체험할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호응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긴 뉴욕에 가서 굳이 비전프로 체험을 위해 애플스토어를 간다는 게 특이하긴 한 거죠.
어쨌거나 미국은 예약의 나라라고 하니 저답지 않게 열심히 미국 애플 홈페이지를 찾아서 예약을 시도했습니다. 어디서 체험할까 하고 찾아보니 뉴욕시에만 10개, 그중 맨하탄에만 7개나 애플스토어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Fifth Avenue 매장을 선택했습니다. 전세계 최초로 개장한 애플스토어로 스티브 잡스의 미니멀리즘 철학이 너무나도 잘 구현된 상징적인 매장입니다.
예약을 하려니 이런저런 질문에 응답해야 했는데 특히 시력에 관한 질문에 답을 해야 했습니다. 비전프로는 다른 VR 기기와 달리 개인의 시력에 따라 내부에 시력 보정용 칼 자이즈 렌즈를 끼워줍니다. 판매가 아닌 체험 때도 필요한데 매장에서 측정이 가능해서 저는 그냥 안경을 쓴다 정도만 입력하고 넘어갔습니다.
확인 이메일이 오고 예약증을 애플월렛에 담고 나니 체험 준비가 끝났습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이날 귀국하는 룸메이트 형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단톡방에서 같이 신청한 1명과 함께 애플스토어로 향했습니다. 구글 지도로는 호텔에서부터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고 나와서 걷기로 했습니다.
이 매장은 센트럴파크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9년 전 출장길에 일을 마치고 밤에 잠깐 들르긴 했지만 그땐 너무 잠깐이었습니다. 이날 다시 찬찬히 보니 스티브 잡스의 심미안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장은 커다란 정사각형 유리상자만 보입니다. 멀리서 봐도 유리상자 한가운데에 금색 애플 엠블럼이 떠 있습니다. 밤에는 이 엠블럼에 조명이 들어옵니다. 9년 전에는 없던 비전프로 모양의 LED 조명이 추가되었네요.
지상에는 유리상자와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만 있고 실제 매장은 지하에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원통형 스테인리스로 미러 마감되어 있고 1mm의 단차도 없이 좌우 대칭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위에 아무런 기계장치가 없이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위를 올려다보면 애플 엠블럼의 아랫부분이 보입니다. 계단은 엘리베이터 주변을 돌아서 설치되어 있는데 기둥 없이 매끈한 캔틸레버 구조입니다. 수직 이동 동선조차도 불필요한 요소 하나 없이 꼭 필요한 기능적 요소만 남겼습니다. 지독히도 필요한 것 외엔 모두 빼버린 디자인입니다.
땅값 비싼 뉴욕에선 모두가 어떻게든 토지를 활용해 초고층 건축물을 지어서 경제성을 극대화하려 하는데 애플은 다릅니다. 그저 땅 위에 사과 한 알을 담은 유리상자를 오브제처럼 올려놓았습니다. 건축적으로 보면 공간의 낭비는 곧 부와 권력의 과시입니다. 마치 천적 눈에 잘 띄고 날기에도 불편하지만 언덕 위에서 화려한 꼬리깃을 펼치고 뽐내는 수컷 공작처럼요. 세계 최고 기업인 애플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을까요?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 때부터 뺄 수 있는 요소는 최대한 빼라고 했습니다. 그의 까다로운 디자인 철학을 조니 아이브(Jony Ive) 디자이너가 생산이 가능한 디자인으로 구현해 냈습니다. 조니 아이브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독일의 전설적인 산업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Dieter Rams)의 'Less is More'라는 디자인 철학을 이어받았습니다. 저는 과거 대림산업(현 DL ENC) 시절 대림미술관(현 D Musem)이 초청한 디터 람스의 강연을 직접 듣는 행운을 얻은 뒤부터 천재 디자이너들 간에 면면이 이어지는 미니멀리즘 디자인 철학을 아주 좋아하게 됐습니다.
내부 매장은 서울의 애플 스토어에서 본 실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전 세계 애플스토어는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이 되어 있습니다. 널찍한 공간에 있는 원목 테이블 위에 애플 기기들이 놓여있는데 비전프로만 하얀 테이블 위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아니 오직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비전프로로 직진했습니다.
다른 기기들과는 전시품을 달리 직접 써보는 것은 안되고 직원에게 예약 내역을 보여주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조금 늦게 따로 온 분까지 3명이 각자 체험을 하기로 하고 기다렸습니다.
예약시간이 되자 여자 직원이 저를 안내해서 벽 쪽에 있는 체험공간으로 데려갔습니다.
안과 진단서가 없다고 하니 안경을 달라고 합니다. 언뜻 정수기 같아 보이는 기계에 안경을 끼우고 도수를 측정한 뒤 비전프로 내부에 시력보정용 렌즈를 끼워줬습니다. 다른 VR 기기들이 종종 초점이 맞지 않기도 하는데 비전프로를 써보니 아주 선명하게 잘 보였습니다.
비전프로를 머리에 쓰기 전에 비전프로를 들고 자신의 얼굴을 스캔하는 절차부터 시작했습니다. 아이폰 페이스 아이디 설정처럼 얼굴을 돌리며 기기에 인식시키는 과정을 거친 뒤 드디어 머리에 썼습니다.
보통 다른 VR 기기들은 첫 화면에 가상의 공간이 보이는데 비전프로는 애플스토어 내부가 그대로 보이고 허공에 아이콘이 몇 개 떠있습니다. 비전프로의 유리를 통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Path Through라는 기능으로 비전프로의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눈앞에 보이는 방식입니다. 아주 약간 필터 낀 듯해 보이지만 거의 눈으로 보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기기 위에 있는 다이얼을 돌리면 아주 부드럽게 주변이 호수나 산으로 바뀝니다. 반대쪽으로 돌리면 다시 부드럽게 현실공간으로 바뀝니다.
직원이 하라는 대로 아이콘 하나를 바라보면 해당 아이콘이 조금 커집니다. 이때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톡 마주치면 아이콘이 실행되는 식입니다.
다른 VR 기기들이 손에 든 일종의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손가락이 최고의 도구라는 잡스의 철학을 이어받은 걸까요? 어쨌든 몇 번의 설정 겸 튜토리얼을 거치니 금방 사용법을 익히게 됐습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저장된 사진을 띄우고 시야를 가득 채우도록 확대해 봤습니다.
엄지와 검지를 붙이고 왼쪽으로 휙 넘기는 동작을 하면 사진이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다음 사진이 보입니다.
바닷가 절벽에서 찍은 파노라마 사진을 시야에 가득 채울 정도로 확대하자 제가 절벽에 서 있는 것 같더군요.
비전프로로 찍은 3D 사진과 동영상을 띄워도 봤습니다. 다른 VR 기기에 비해 확대해서 선명했습니다.
3D로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는 영상을 보는데 이제부터 추억을 3D로 찍어두고 본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플TV+를 구동하고 아바타를 선택하자 앞에 보이는 매장이 어두워지더니 극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화면에서 아바타의 3D 영상이 재생되는데 완전히 저만의 1인 극장에 앉아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화질도 극장과 차이를 못 느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가락으로 선택하고 옮기는 너무나 직관적인 작동 방식입니다. 비전프로 아랫부분에 내장된 카메라가 제 손가락을 인식해서 별도의 리모컨이 필요 없습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선 탐 크루즈가 특수 장급을 씨고 작동시키지만 그런 것도 필요 없습니다. 물론 탐 크루즈는 머리에 뭘 쓰지는 않았지만요^^
직원이 혹시 겁이 좀 많냐고 물어봐서 그런 것 없다고 하니 몰입영상(Immersive Video)을 보여줍니다.
시작하자 눈앞에 가수와 밴드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 앞에서 오직 저를 위해 노래하는 것 같았습니다.
화면이 바뀌면 절벽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사람이 보이고 저도 그 외줄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기구를 타고 같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마그마가 분출하는 활화산 정상에 서있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경험은 스포츠 관람이었습니다.
먼저 메시가 뛰고 있는 MLS 마이애미 FC의 경기장면을 골대 바로 뒤에서 봤습니다. 크로스가 날아오고 슛이 골대를 맞고 튀어나가는 모습이 너무 생생했습니다.
뒤이어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파크로 바뀌더니 제가 1루 베이스 앞 1열에 앉아있더군요. 타자가 공을 치고 유격수의 잡아 1루로 던진 공을 1루수가 놓치자 저도 모르게 손으로 세이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영상의 화질이 최소 4K는 되는 것 같이 선명했습니다.
다른 영상보다 특히 스포츠 경기를 봤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프로 스포츠는 갈수록 고객들의 시간을 놓고 스마트폰이나 게임, OTT 등과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경기장에 직접 오는 충성 고객 외에 TV 등으로 시청하는 체험은 딱히 달라진 게 없습니다. 만약 비전프로가 보여준 것처럼 경기장 1열에서 관람하는 체험이 가능하다면 구단이나 방송사들은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짧은 체험이고 아직 초기여서 인터랙티브 한 체험을 할 수 없었지만 비전프로로 중계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과 실시간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전 세계 사람들을 팬으로 만들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역시나 MLS(메이저리그 사커) 독점 중계권을 갖고 있는 애플은 앞으로 8K 3D로 볼 수 있는 MLS 시즌패스를 곧 출시할 예정이라고 지난 2월에 발표했습니다. 이런 중계가 구현된다면 진짜 스포츠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 겁니다.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시장도 마찬가지겠죠.
https://9to5mac.com/2024/02/21/apple-vision-pro-mls-film-8k-3d/
3명이 체험을 마치고 대화를 해보니 저마다 관심분야가 달라서 느낀 점도 달랐지만 한마디로 미래가 여기 있구나라는 생각은 일치했습니다.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되겠구나 싶을 정도로 몰입도가 달랐습니다.
애플 비전프로는 다른 VR 기기와 비교가 안되게 비쌉니다. 그래서 대중적이지 않을 거라고 했지요.
하지만 체험을 통해 본 비전프로의 성능은 확실히 뛰어났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연산을 순식간에 아무런 딜레이 없이 선명하게 구현한다는 게 다른 VR 기기와의 성능 차이 같았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5월에 전시회에서 KBS가 출품한 오큘러스를 이용한 음악방송 무대를 보고 화질과 생생함이 비전프로에 비해 너무 떨어져서 실망했습니다. 8K는 고사하고 Full HD도 아직 구현을 못하더군요. 비전프로가 비쌀만하구나 싶었습니다. 다른 VR 기기들을 기반으로 콘텐츠나 사업을 구상하는 기업이라면 애플 비전프로의 성능과 가능성을 꼭 확인해봤으면 합니다.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면 키보드도 없는 이걸로 뭘 할 거냐고 비웃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거라는 보고서를 내놓은 세계적인 컨설팅 기업도 있었지만 아이폰은 몇 년도 안 되어 세상을 바꿨습니다. 특히 앱 스토어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폰으로 인해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구상하고 앱 개발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지난번 WWDC24에서 새로운 OS 발표 때 VisionOS 2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비전프로 앱 스토어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과연 비전프로는 세상을 또 한 번 바꾸는 기기가 될까요?
이제 길 건너 플라자호텔만 살짝 구경하고 각자 일정에 따라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저는 센트럴파크 구경 후 뉴욕 사는 처제를 만난 뒤 저녁엔 드디어 뉴욕 양키스 경기를 관람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