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주재원을 지내고 오랜만에 한국에 오신 책임님께,
해외 주재원에서 복귀하신 책임님은 업무 적응기간이라 여유가 좀 있으셨던 것 같아요. 팀원들 한 명 한 명과 티타임도 하시고 오랜만에 온 한국, 서울 그리고 이곳 본사의 달라진 분위기를 한껏 느끼시는 듯했으니까요.
하루는 저를 불러 커피 한잔을 하자고 하시기에 따라갔더랬습니다. 오픈된 카페가 아니라, 회의실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하시길래 조금은 의아했지만, 해외 출장지에서 이미 세 번이나 뵀으니 나름 내적 친밀감이 충분히 형성되었기에 회의실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책임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죠. 한국에 오랜만에 오신 만큼 기분이 좋고 설레기까지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저에게 몇 살쯤 되냐고 물으시길래 "그런 걸 왜 물으실까요?" 반문했던 거 기억하세요? 그러더니 결혼에 대한 생각은 있느냐 물으셨죠.
이쯤 되니 살짝 '내가 왜 회의실에 갇혀서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음을 감지했어요. 그런 거 물어보시려면 괜찮은 남자 소개나 시켜주고 물어보시라며 '빙그레 썅년 모드'를 장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뿔싸.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책임님이 전에 얼토당토않은 일 같지도 않은 일들을 시켜서 짜증 나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나눌 기회마저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방심한 제가 바보였던 거죠.
책임님은 칠판에 강의하듯 결혼생활의 장점에 대해 나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쯤 되니 저는 공개적인 장소도 아니고 회의실이겠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마음을 먹고 웃으며 제대로 빙썅 모드로 대응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책임님, 여자가 이 남자만 득실 한 회사에서 얼마나 고독하고 힘겹게 사회생활하고 있는지 아세요? 남자 상사들 타입별로 이미 겪을 만큼 겪었고, 그들이 여자 직원을 동료가 아닌 유리천장을 만드는 거 상상은 해보셨나요? 십 년째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여자 후배에게 결혼 적령기 놓치지 않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고 따뜻한 조언을 해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진실로 후배가 조직에서 커리어를 쌓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조언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오죽하면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까요? 저 영업사원일 때는 여자는 임신하면 회사 관둬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죠. 지금은 그래도 여성분들 육아휴직도 쓸 수 있고, 많이 배려받으면서 일하고 있네요.
하지만, 또 돌아보세요. 이 많은 팀 중에 여자 팀장 있나요? 제가 십 년 넘게 회사 생활하면서 여자 팀장 밑에서 일해본적 없어요. 그리고, 사실 주변에 온갖 다양한 스타일의 남자 동료들 보면서 남자에 대한 기대나 환상 같은 것도 많이 사라졌어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진짜 여자 후배 걱정하신다면 <82년생 김지영>이란 책 한 번 보고 또 한 번 저랑 이런 이야기 나눠보시죠.
저는 제가 래퍼가 된 줄 알았습니다. 책임님께 제 의견을 아주 공손한 말투로 미소를 섞어가며 말씀드리고 나니 책임님은 멋쩍게 웃으시며 한마디 하셨었죠.
" '아는언니' 선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르네~"
저는 다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요, 저 이 회사에 신입 공채로 입사해서 10년 넘게 보낸 여자예요~"
다시 한번 따뜻한 웃음을 보여드렸습니다.
다음날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여러 명 모여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또 공교롭게도 책임님 앞에 앉아 식사하게 되었어요. 저는 서무 일을 보는 여직원에게 말했죠.
"xx야, 우리 팀 도서지원비 있지? 그거로 우리 책임님께 소설 <82년생 김지영> 하나 사드려~"
책임님은 말씀하셨어요.
"아니야, 나 그거 필요 없어. 어제 인터넷으로 서평 다 봤어. 음... 안 읽어도 되겠더라"
옆의 공대생 출신 남자 책임은 말했습니다.
" 아, 82년생 김지영? 그거 페미니즘 책이잖아요."
한순간의 논쟁의 가치도 없게 만들어버린 그 책의 값어치는 한 단어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전의를 상실했어요. '아,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일하고 있구나.' 한숨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또 떠들면, '저러니까 시집도 못 가고 저러고 있구나... 독한 것...'이라는 소리밖에 더 들을까 싶어 그냥 넘겼습니다.
책임님, 사회 교육을 많이 받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여자 사원의 비중은 전보다 훨씬 늘었어요. 수치까지는 모르겠지만 체감상 그러하죠. 하지만 둘러보면 조직책임자가 여자인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리고 그 여성 조직책임자가 제 목소리를 내고 롤모델이 되어주는 경우는 더더욱 쉽게 찾기 쉽지 않죠. 남자분들이 '형-동생'을 찾으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회사생활을 할 때, 여성들은 누구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응원받으며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부디, 저와의 대화가 요즘 젊은 애들은 전 같지 않게 되바라졌다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여자라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원하지도 않아요. 다만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 변화를 제대로 바라봐주셨으면 해요. 그냥 한번 던지는 말이 아닌 진심을 담은 후배와의 대화가 있길 기대해봅니다. 책임님이 불러서 소 끌려가듯 회의실로 불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책임님께 먼저 찾아가 제 이야기를 하고 커리어를 상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2020년 10월
지금도 책임님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회사도 더 오래 다닐 싱싱한 고등어처럼 펄떡펄떡 뛰는 후배 올림